필리핀 대선 D-1…독재자 마르코스 일가 36년만에 재집권하나

입력 2022-05-08 07:00
수정 2022-05-10 12:00
필리핀 대선 D-1…독재자 마르코스 일가 36년만에 재집권하나

마지막 여론조사서 지지율 56%…당선시 '반독재' 시민 반발 예상

두테르테 '친중 행보' 이어갈 듯…'사치의 여왕' 어머니 이멜다에 의존



(하노이=연합뉴스) 김범수 특파원 = 필리핀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필리핀은 오는 9일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을 비롯해 상원의원 13명, 하원의원 300명 외에도 1만8천명의 지방 정부 공직자를 선출한다.

8일 마닐라 현지 외교가 등 소식통에 따르면 독재자 고(故)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신사회운동(KBL) 소속 마르코스(64) 전 상원의원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계속하면서 그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따라서 그가 당선될 경우 새로운 정부의 대외 정책 및 '반독재'를 외치는 세력의 반발 여부에 벌써부터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마르코스 지지율 56%로 '압도적 1위'

마르코스는 이번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그는 현지 조사기관인 펄스 아시아가 지난달 16∼21일 2천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56%의 지지율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히는 레니 로브레도(57) 부통령은 23%로 뒤를 이었다.

또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43) 상원의원은 지지율이 7%에 그친 상황이다.



부통령 선거는 마르코스와 러닝 메이트를 이룬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43) 다바오 시장이 55%의 지지율로 빈센트 소토 상원의장(18%)을 37% 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이에 따라 현재 마르코스와 사라의 당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 마르코스 가문 재집권시 시민 반발 '후폭풍' 예상

마르코스는 독재자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집권했다.

특히 정권을 잡은 뒤 7년이 지난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명의 반대파를 체포해 고문하고 살해하면서 독재자로서 악명을 떨쳤다.

국고에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정부 재산을 빼돌렸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마르코스 일가가 집권 당시 부정 축재한 재산은 100억(12조7천억원) 달러로 추산된다.

이에 참다못한 시민들이 1986년 '피플 파워'를 일으키자 마르코스는 하야한 뒤 3년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작고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마르코스 일가의 재산 환수를 위해 대통령 직속 바른정부위원회(PCGG)를 구성했다.

PCGG는 지금까지 마르코스 일가를 상대로 1천710억 페소(4조원)를 환수했고 현재 추가로 1천250억 페소(3조원)를 되돌려받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따라서 마르코스가 당선될 경우 거액을 부정축재한 독재자 가문이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 뒤 36년만에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 셈이어서 필리핀은 선거 후에도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르코스 치하의 암울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독재자의 아들은 출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온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앞서 필리핀의 여러 시민단체들은 지난해 11월부터 마르코스의 대선 출마를 금지해달라며 총 6건의 청원을 선관위에 잇따라 제출했다.

이들 단체는 그가 공직을 맡았던 1982∼1985년에 소득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탈세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전력을 들어 대선 출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내국세법에 따르면 세금 관련 범죄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으면 공직 선거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선관위는 6건의 청원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다면서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에 해당 단체들은 선관위 결정에 불복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법원에 소송을 내기로 했다.

만일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돼서 아버지의 전철을 따른다면 다수의 시민들이 항거할 수 있다는 전망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나온다.

◇ 미·중 갈등 와중에 외교 정책 방향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필리핀의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현직 대통령인 두테르테는 동맹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친중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 2016년 권좌에 오른 두테르테는 수시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이같은 태도를 견지해왔다.

특히 중국 선박 수백척이 영유권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의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휫선(Whitsun) 암초에 장기간 정박하는 와중에도 중국을 상대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그의 행보를 놓고 국내에서 비난이 확산했다.

또 재작년 2월 미국의 비자발급 거부에 항의하면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문군 협정(VFA) 종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양국은 지난 1998년 훈련 등을 위해 필리핀에 입국하는 미군의 권리와 의무 등을 규정한 VFA를 체결했다.

VFA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군사 훈련을 벌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

이후 필리핀은 2차례에 걸쳐 협정 종료 시한을 연장했다가 결국 지난해 7월 30일 협정을 계속 유지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이런 가운데 마르코스가 당선되면 두테르테의 기존 정책을 이어갈 공산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마르코스는 대선 출마 후 중국과의 관계를 묻는 언론 매체의 질문에 "두 나라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밝혀왔다.

이는 동맹인 미국과 상의하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설정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아울러 이번 선거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춘 두테르테의 딸과 러닝 메이트로 제휴를 맺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는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필리핀 외교 정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지지층이 두터운 두테르테 가문의 협조 없이는 통치가 어렵다"면서 "사라가 부통령이 되면 대통령 못지 않은 위세를 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마르코스의 경쟁자인 로브레도는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우선시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권변호사인 출신인 만큼 미국과 호흡을 맞추면서 홍콩과 신장(新疆) 위구르,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는 한편 남중국해 자국 해역 내에서 끊이지 않는 중국 선박의 침입에 강력 대처할 거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사치의 여왕' 이멜다 대외활동 확대하나

마르코스의 어머니 이멜다(92)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멜다는 남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보석류와 명품 구두 등을 마구 사들여 '사치의 여왕'으로 불렸다.

뿐만 아니라 메트로 마닐라 시장과 주택환경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맡아서 남편 못지 않게 왕성한 대외활동을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멜다는 1992년 귀국해 대선에 도전했다가 낙마했지만, 1995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3회 연임에 성공했다.

그의 딸 이미는 일로코스 노르테주에서 3선 주지사를 지냈다.

필리핀 정계에 따르면 마르코스는 모친인 이멜다의 권유로 대선에 출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근 CNN필리핀과의 인터뷰에서 "물론 나 자신이 결정해서 대선 후보 등록을 마쳤지만 어머니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실토했다.

또 가족 전체가 1990년대에 필리핀으로 복귀한 뒤 가문의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배경으로 주지사와 상원의원에 선출된 뒤에도 늘상 어머니로부터 자문을 받으며 정치 경력을 쌓아왔다.

따라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멜다가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bum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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