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위크'에 해외 찾은 日 관광객, 역대급 엔저에 '물가 쇼크'

입력 2022-05-06 05:30
'골든위크'에 해외 찾은 日 관광객, 역대급 엔저에 '물가 쇼크'

"하와이 컵라면 한그릇이 5천800원"…엔저에 美인플레 겹쳐

'디플레의 나라' 일본, 30여년 만의 전방위적 물가상승에 '당혹'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최장 열흘간의 '골든위크'(황금연휴·4월 29일∼5월 8일)를 맞아 하와이 등 해외 관광지를 찾은 일본인들이 기록적인 엔저(엔화 가치 하락) 현상으로 인한 '물가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약 열흘간에 걸친 연휴를 '골든위크'라 부르는데, 올해는 3년 만에 '코로나19 긴급사태'가 발령되지 않은 연휴여서 많은 일본인이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 여행지로 꼽히는 하와이의 경우 40년 만에 최고치까지 치솟은 미국의 인플레이션에다 20년 만에 최저치로 추락한 엔저 현상까지 겹치면서 일본 관광객들이 느끼는 물가 부담이 더욱 커졌다.

◇ "컵라면 한 그릇이 5천800원"…하와이 찾은 日관광객 '물가 쇼크'

니혼TV에 따르면 황금연휴가 시작하기 직전인 지난달 28일 기준 하와이행 항공편 예약 건수는 일본항공(JAL)이 작년 동기 대비 약 9배, 전일본공수(ANA)가 약 5배 급증했다.

특히 이번 '골든위크'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각종 규제조치가 완화되거나 해제된 뒤 처음 맞는 연휴인 만큼 많은 일본인이 하와이 등 해외 관광지를 찾아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하와이와 괌 등을 찾은 일본 관광객들은 미국 내 높은 물가와 달러당 130엔대까지 가치가 하락한 엔저 현상이 겹치면서 '물가 쇼크'에 직면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다.

후지뉴스네트워크(FNN)에 따르면 하와이를 찾은 일본 관광객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렌터카 가격과 각종 현지 물가에 놀라고 있다.



'가와이 하와이 투어'의 모리 다쿠야 대표는 FNN에 "과거 3달러 정도였던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이 지금은 4달러 39센트가 됐다"며 "엔화로 환산하면 600엔(약 5천800원)이나 된다"고 말했다.

일본 관광객 이와데 씨는 "좀 가볍게 먹으려고 야키소바와 라면을 주문했을 뿐인데 30달러(약 4천엔)가 나왔다"며 "물가가 너무 비싸 놀랐다"고 말했다.

미국의 높은 인플레이션에 엔저 현상으로 현지에서 일본 관광객들이 사용하는 엔화의 구매력은 작년 동기 대비 30% 가까이 하락했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4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30엔까지 상승했다. 엔화 가치가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한 것이다.

지난달 28일 일본은행(BOJ)이 경기 활성화를 위해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힌 뒤 엔화 약세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달러로 환산한 물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하와이 등 해외를 찾은 일본 관광객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만난 한 일본인 부부는 니혼TV에 "엔저 현상 탓에 비용 부담은 크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3년 만에 규제조치 없이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 디플레에 익숙한 일본, 30여년 만의 인플레에 '당혹'

황금연휴를 맞아 해외를 찾은 여행객뿐 아니라 일본 내 소비자들도 약 30년 만에 경험하는 가파른 물가 상승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일본 사회는 거품이 붕괴한 1990년대 초 이후 30년 넘게 심각한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에 시달려 왔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사토리 세대'(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태생)는 대부분 태어나서 한 번도 물가 상승이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물가라는 건 늘 정체되거나 일정 수준으로 관리되는 것이라 여겨왔던 터라 올해 들어 갑자기 나타난 인플레이션 현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일본의 생활물가 상승세는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일본 맥주업계 1위인 아사히맥주는 지난달 26일 '수퍼드라이' 등 주요 제품의 가격을 14년 7개월 만에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오는 10월 출하분부터 맥주는 6∼10%, 위스키는 7∼17% 인상한다는 계획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여파로 곡물과 알루미늄 가격이 급등하면서 맥주 제조 비용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국제유가 상승 등으로 물류비용이 오른 데다 엔저 현상까지 겹치면서 수입 물가가 상승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아사히맥주 홍보 담당자는 아사히신문에 "비용 상승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기업의 노력만으로 (비용 상승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 직장인들이 즐기는 맥주뿐 아니라 식빵과 잼, 커피, 마요네즈, 케첩, 소시지 등 주요 식료품 가격도 줄줄이 올랐다.

국제 밀 가격이 오르면서 야마자키제빵(7.3%), 후지빵(8%) 등 슈퍼마켓에서 싸게 살 수 있는 식빵 가격이 줄인상 됐고, 빵과 같이 먹는 잼 가격도 3∼7% 뛰었다.

커피(네슬레일본 10~20%), 소시지(닛폰햄 5~12%), 치즈(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슬라이스치즈 22엔 인상) 등도 가격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인플레이션 없이 살아온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이 같은 전방위적 물가 인상은 적잖은 충격이다.

일본 조사업체 '데이코쿠 데이터뱅크'는 4월 기준으로 105개 기업이 라면·식용유·음료 등 4천81개 품목의 가격을 올렸다고 집계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9년 전 취임했을 때 1990년부터 지속된 일본의 저성장을 이끈 디플레이션 현상을 타개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마침내 그의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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