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제재한다면서 러시아 원유 은밀히 사들여"
EU행 러시아산 원유 수출, 4월 들어 오히려 소폭 늘어
제재 회피 수법 동원해 '조용한 거래' 이뤄져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징벌적 제재'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이들이 러시아산 원유를 더 사들이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서방이 부과한 제재로 러시아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원유 산업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오히려 최근 몇 주 간 핵심 최대 고객인 유럽행 원유 선적을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유조선 추적 사이트 탱커트래커닷컴에 따르면 러시아의 침공 직후인 지난달 하루 130만배럴로 떨어졌던 러시아 항구발 유럽연합(EU)행 원유 수출은 4월 들어 현재까지 하루 평균 160만배럴로 반등했다.
또 다른 에너지 관련 정보제공업체 케이플러 역시 유럽행 러시아산 원유 선적량이 3월 중순 하루 평균 100만배럴에서 4월에는 130만배럴로 늘었다고 집계했다.
현재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했으나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EU는 석탄만 제재했을 뿐 아직 원유 수입 중단을 검토만 하는 상황이다.
국제사회가 러시아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원유 대금은 러시아 정부의 전비로 쓰이는 만큼 유럽 각국과 대형 석유 회사 등 주요 거래처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많은 나라가 유가 급등과 경제적 타격 등에 대한 우려로 러시아산 석유가 절박하게 필요한 게 현실이라고 WSJ은 설명했다.
WSJ은 러시아산 원유 거래에 따른 역풍을 최소화하려고 석유 업체나 중개업자가 최대한 조용히 거래하기 원하는 까닭에 원산지를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목적지 불상'(destination unknown)으로 표시된 유조선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탱커트래커닷컴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이렇게 표기된 유조선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4월 들어서는 1천만 배럴이 넘는 원유가 정해진 행선지가 없는 유조선에 실렸다.
행선지가 적히지 않은 유조선은 해상에서 원유를 더 큰 선박에 환적하고 러시아산 원유는 이 배에 원래 실린 화물과 섞임으로써 원산지가 불분명하게 된다.
WSJ는 이런 식으로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 상당수 유럽 국가로 향한 러시아산 원유량은 이달 들어 3월 평균에 비해 배 이상 늘었다고 전했다. 유럽 최대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국인 네덜란드와 핀란드행 분량도 많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산 원유를 사는 업체나 나라의 상당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일부는 새로운 제재가 이뤄지기 전에 미리 러시아산 원유를 서둘러 구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WSJ는 짚었다.
원유 시장에선 또 '라트비안 블렌드', '투르크메니스타니 블렌드' 등의 이름이 붙은 석유제품이 팔리고 있는데, 이런 제품은 러시아산 원유가 상당량 섞였다고 보면 된다고 업자들은 귀띔했다.
이렇게 판매하는 석유제품은 러시아산 원유의 혼입 비율이 50% 미만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러시아산 제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방의 제재를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수법들은 이란, 베네수엘라처럼 서방의 제재를 받는 나라가 제재를 회피해 수출할 때 주로 사용한다.
글로벌 금융그룹 USB AG의 애널리스트 조반니 스타우노보는 "EU가 러시아산 원유를 전면 제재하는 것은 마치 '당장 내일 월급 40%를 깎을 테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EU 상당수 나라와 석유업체가 하루아침에 러시아산 석유를 전면 차단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가 엄청난 할인가에 팔리는 상황에 귀가 솔깃한 사람도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전쟁 이전 기준가와 비슷하거나 보통 배럴당 1∼2달러 싸게 팔리던 러시아 우랄산 원유는 현재 배럴당 브렌트유 기준가보다 20∼30달러 아래로 거래된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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