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눈만 뜨면 피난짐…무한반복되는 치매 할머니의 전쟁공포
치매 환자 가족 "전쟁 이후 약 구하기 힘들어져 증상도 악화"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80대 후반인 올가 보이착의 할머니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작은 도시에 거주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할머니는 매일 아침 러시아군의 침공과 관련한 TV 뉴스를 볼 때마다 공포에 질려 피난 짐을 싸기 시작한다.
남편은 부인을 막기 위해 집 열쇠를 감추고, '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에게는 러시아군의 침공을 전하는 TV 뉴스가 매일 아침 새로운 소식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0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의 노년층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소개했다.
피난을 떠나거나 오히려 자원입대하는 젊은 층과는 달리 노년층은 집을 떠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올가 보이착의 조부모도 전쟁 이후 집에 남았다. 은퇴한 의사인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야 한다는 자식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호주에 거주하는 손녀 보이착은 조부모와 매주 화상 전화를 하면서 근황을 듣고 있다.
보이착은 NYT에 "매일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피난 짐을 싼다"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보이착이 최근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트위터에 올리자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NYT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의 한 도시에 거주하는 82세의 치매 환자 리타의 사연도 소개했다.
최근 3년간 치매 증상이 악화한 리타는 현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자신이 사는 지역이 러시아군에 점령됐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함께 사는 손자가 자신의 외출을 막으면 화를 낸다.
가족들은 할머니의 부엌 출입을 막기 위해 자물쇠를 설치하기도 했다.
전쟁 후 식량 부족으로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한꺼번에 각종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리타의 손녀인 리자 보브첸코는 전쟁 이후 할머니의 증상이 악화했다고 전했다. 치매 환자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중요하지만 전쟁 때문에 산책과 이웃과의 대화 등이 불가능해졌고, 약을 먹는 것도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남부의 전투가 격화하면서 결국 리타의 가족들도 피난을 선택했다.
NYT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갈 수 있었던 리타와는 달리,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나이와 각종 질병 탓에 자식들만 피난을 보내고 집에 남는 노년층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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