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 현장" 영국 농장서 탈출한 우크라이나인들
"비현실적 노동 목표치에 손발에 피나도록 일해"
현행 영국 비자 제도서 소외…"전쟁통 귀향도 못하고 불법근로 내몰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영국의 한 농장에서 일했던 우크라이나 노동자 수백명이 '노예제'에 가까운 열악한 노동환경을 피해 도망쳤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가디언은 이같이 전하며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체리 농장에서 애인과 함께 일했던 우크라이나 여성 인터뷰를 실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농장에서 비현실적인 목표량을 부여받았고, 장갑을 끼고 일하는 게 허용되지 않아 손에서 피가 나거나 살갗이 벗겨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 여성은 "노동자들은 협박과 굴욕을 받으면서 손과 발이 피가 날 때까지 끊임없이 일해야 했다"며 "만약 한 사람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면 숙소로 보내져 자력으로 회복하거나 집에 돌아가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판 노예제와 유사했다"며 "농장에서 일한 것은 아마 내 인생에서 최악의 경험이자 최악의 대우에 처한 시간"이라고 전했다.
이들이 머물렀던 거대 규모의 농장 노동자 캠프에서는 38명을 제외한 수백명이 탈출했다. 그는 "떠난 사람들은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도시에서 불법으로 일한다"고 설명했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은 "부모님은 (러시아군에 의해) 도시가 공격당하고 있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크라이나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며 "(여기서) 갇힌 기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비슷하게 농장에서 도망친 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여기서 불법으로 일해야만 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고 덧붙였다.
현재 이 여성과 그의 애인도 청소와 건설 관련 업무를 하며 지하경제에 노출된 상황이다.
이들이 불법 근로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행 비자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 영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주요 비자제도인 '우크라이나 가족 계획'이나 '우크라이나 후원 계획'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다.
전자는 영국에 사는 가족이 있어야 하고, 후자는 영국이 아닌 우크라이나나 다른 국가에서 신청이 가능하다.
다음 달 3일부터 접수를 받는 '우크라이나 확대 계획'이 시행되면 현행 비자 제도에서 소외된 이들도 3년간 영국에 머물 수 있다는 게 영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올해 1월 1일 기준으로 비자가 만료된 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난해 이미 만료된 사람은 신청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가디언 인터뷰에 응한 여성은 "아무도 계절노동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며 "영국에서 우리 권리가 잘 보호받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한탄했다.
실제 지난해 말 영국 내무부와 환경식품농림부(DEFR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이 EU를 탈퇴한 브렉시트 이후 농장에서 수확일을 하는 계절노동자들은 극히 열악한 복지 조건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자들이 증언한 구체적인 노동 실태로는 건강·안전 장비 부족, 인종차별, 화장실이나 수돗물, 부엌이 없는 숙박시설 등이 포함됐다.
영국에서 계절노동자 비자로 일하는 노동자 중에는 우크라이나인 비중이 크다.
지난해 기준 계절노동자를 대상으로 발급되는 'T5' 비자 2만9천631건 중 약 67%(1만9천920건)가 우크라이나인을 대상으로 발급돼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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