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제노사이드와 푸틴의 운명
(서울=연합뉴스) 정규득 논설위원 = "음악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폐허가 된 도시와 죽은 사람들의 침묵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침묵을 여러분의 음악으로 채워주세요" 지난 4일(현지시간) 열린 제64회 그래미 시상식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깜짝 등장했다. 그는 사전녹화한 화상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음악인들은 턱시도 대신 방탄복을 입는다. 다친 사람들을 위해 병원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말로 자국의 참혹한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세계인들에게 '침묵을 제외한 모든 도움'을 청했다. 그의 연설은 우크라이나 소도시 부차에서 러시아군이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을 놓고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젤렌스키는 이날 러시아의 만행을 '제노사이드'(genocide)로 규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인종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뜻하는'cide'의 합성어다.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이 1944년 처음 사용했다. 국제법상 '비인도적 폭력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립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나서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PPCG)'을 채택하면서 '특정 국민과 민족, 인종, 종교, 정치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절멸시킬 목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제노사이드로 정의했다.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은 국제사회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고 만든 국제법이다. 우리나라는 1950년 이 조약에 가입했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도 집단학살의 대표적 사례다. 스탈린 정권의 무자비한 수탈과 탄압으로 대기근이 발생해 많게는 1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홀로도모르는 '기아로 인한 대량살인'(mass killing by hunger)이라는 뜻이다. 2차대전 후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로 200만 명이 숨졌고,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인종청소'로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세 십자군이 유대인들을 불에 태워 죽인 것이나, 고대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르타고를 파괴한 것도 지금 시각에서 보면 전쟁범죄다. 이번 '부차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지 현재로선 단언하기 어렵다. 미국은 푸틴을 '전범'이라 칭하면서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데는 신중한 입장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조사에 나선 만큼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11일 한국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한다.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호소할 것으로 보이지만, 국제사회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는 5일 유엔 안보리 연설에서 유엔의 무능과 무기력을 개탄했는데, 설령 부차 사건이 제노사이드로 결론 나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무탈할 것이다. 제노사이드의 단죄는 권좌에서 쫓겨나거나 국외 추방이 돼야 가능하다.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도 실각 후 1년이 지나서야 체포됐다. 그런데 푸틴은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사실상의 황제다. 지지율도 80%를 넘는다. ICC가 기소를 해도 실효성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러한 푸틴도 끝내 피해가지 못할 심판대가 있으니 '역사의 법정'이다. 그는 21세기 가장 야만적인 독재자와 침략자의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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