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러군에 붙잡혀 피 토할 때까지 고문당한 통역사

입력 2022-03-23 20:47
수정 2022-03-24 12:15
[우크라 침공] 러군에 붙잡혀 피 토할 때까지 고문당한 통역사

국경없는기자회 사례 발표…"증거자료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출"

프랑스 언론과 일하던 중 피신한 가족 만나러 가다가 9일간 피랍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자동차 앞에 '프레스'(Press)라고 적혀 있는데도 러시아 정찰대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민간인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러시아군은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피를 토할 때까지 맞았고, 전기 충격기로 고문도 당했다.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를 취재하는 프랑스 언론사의 현지 코디네이터 겸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니키타(32·가명)씨가 러시아군에 붙잡혀 9일 동안 당한 끔찍한 경험을 국경없는기자회(RSF)가 23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우크라이나에서 IT 회사에 다니던 니키타씨는 2013년부터 프랑스 언론사 코디네이터 활동을 부업으로 해 오다 전쟁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라디오 프랑스 전담 코디네이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니키타씨가 러시아군에 잡힌 것은 지난 5일이다.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라디오 프랑스 기자들과 함께 있다가 가족들이 피신한 지역에 폭격이 거세지고 있다는 소식에 안부를 확인하고 오겠다며 취재 차를 빌려 간 이후였다.

니키타씨가 운전한 차는 매복해있던 러시아군이 난사한 총에 맞고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6명의 군인은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폭행했다. 니키타씨를 포격을 앞두고 현장을 찾은 우크라이나 정찰병으로 의심한 것이다.

자동소총 개머리판으로 여기저기를 맞은 니키타씨는 치아가 깨지고 피를 토했다. 어떤 군인은 그를 도랑에 던져놓은 채 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듯 머리 부근을 겨냥해 총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결혼반지와 신발을 빼앗긴 니키타씨는 숲속 야영지에서 나무에 묶인 채 군인들이 휘두르는 개머리판과 쇠막대기에 속절없이 맞아야 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8일에는 납치된 다른 민간인 2명과 함께 장갑차에 실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군인들은 그에게 스파이가 아니냐고 캐물으면서 오른쪽 다리에 5∼10초간 전기 충격을 여러 차례 가했다.

니키타씨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쓰고 서명하고 나서 바닥이 물로 흥건한 지하실로 옮겨졌고, 이틀 뒤 다시 한번 옮겨진 지하 방에서는 피랍된 우크라이나 전직 고위 공무원을 만났다.

군인들은 13일 니키타씨를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숲에 풀어줬다. 혹시나 총을 쏘지 않을까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간 그는 지나가는 민간인의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RSF는 지난 17∼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리비프)에 개소한 언론자유센터에서 니키타씨의 이러한 증언을 확보했다. RSF는 목격자 진술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모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할 계획이다.

크리스토프 들루아르 RSF 사무총장은 "니키타씨의 증언은 러시아군이 언론인을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며 "용감한 니키타씨의 증언을 ICC에 제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말했다.

니키타씨는 끔찍했던 기억에도 외신 코디네이터 업무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울 수는 없는 자신에게는 이것만이 조국의 자유에 기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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