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나만 안전하다는 게 부끄럽다"…고국 위해 총든 美우크라계

입력 2022-03-11 06:54
[우크라 침공] "나만 안전하다는 게 부끄럽다"…고국 위해 총든 美우크라계

60대 택시기사에 10대 종업원까지…록스타·무용수·배우·정치인도 참전



(뉴욕=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 = 러시아군을 물리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잘 살고 있었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도 고국으로 돌아가 총을 들고 있다.

대부분 평생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고향 땅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분노해 망설임 없이 참전을 결심하고 시민의용군에 가담한 것이다.

1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유리 블라즈케비치(63)는 지난주 차고 앞에서 휴대전화기로 우크라이나 뉴스를 읽다가 숨진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크라이나 르비우 출신인 그는 NYT에 "페이스북을 통해 전쟁을 보고 답글을 달며 눈물을 흘리느니 차라리 직접 가서 돕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뉴욕으로 이주한 블라즈케비치는 "그들(소련)은 우크라이나 역사와 문화를 파괴했다"면서 "시키는 일은 뭐든 다하겠다. 트럭을 운전할 수도 있지만 직접 총을 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며 폴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의 유명 우크라이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이반 다닐류크(18)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을 결정했다.

14살 때 뉴욕에 이민 온 다닐류크는 "솔직히 전쟁 전까지 우크라이나를 그리워한 적이 없다"면서 "친구들이 싸우는 동안 내가 여기서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기술기업 경영자로 활약하는 안드레이 리스코비치(37)는 최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고향인 자포리자로 향했다.

유럽 최대 규모인 자포리자 원전을 장악한 러시아군에 맞서는 그에게 동료 병사들은 '미국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리스코비치는 "물총을 제외하면 평생 한 번도 총을 잡아본 적이 없다"면서 테크 경영자의 전공을 살려 민병대에서 물류와 조달을 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뉴저지주의 산림기사 유리 니콜라예비치(55)는 옛 소련 시절 군 복무 경험이 있다며 "며칠만 적응하면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우크라이나 본국에는 스스로 총을 잡은 의용군이 훨씬 더 많다. 무용수, 극작가, 국회의원, 록스타, TV 배우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에서 수만 명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키이우(키예프) 오페라 무대에 오르기로 돼 있던 무용수 올렉시 포톰킨(33)은 대신 총을 쥐고 의용군에 합류했고, 고려인 영화배우 겸 TV 진행자 파샤 리는 지난 6일 러시아군의 포격에 전사했다.

록그룹 붐박스의 안드리 흐빌류크는 미국 투어를 포기하고 키이우 내 순찰 지원에 나섰고,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과 여성 국회의원인 키라 루딕 등 정치인들도 총을 들고 지인들을 모아 러시아군에 맞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병사들에게 보급품을 제공하는 자선단체를 운하는 코미디언 세르히 프리툴라는 WSJ에 "푸틴의 가장 큰 실수는 오직 우크라이나군이나 일부 국수주의자들과 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라며 "그들은 이 나라 전체와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firstcirc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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