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In] 러시아 숨통 죌 '생명줄'인데…에너지는 못 건드리는 바이든

입력 2022-03-05 10:00
[이슈 In] 러시아 숨통 죌 '생명줄'인데…에너지는 못 건드리는 바이든

작년에만 천연가스·원유 수출로 143조원 벌어…예산의 36%

에너지 금수 러시아에 치명타지만 서방 경제에도 후폭풍 커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상대로 고강도 경제제재에 착수했지만 정작 러시아의 '돈줄'인 에너지는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천연가스와 원유의 주요 수출국인 러시아는 지난해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약 1천190억 달러(약 143조 원)를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로 벌어들였다.

에너지 자원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필요한 전쟁 예산을 확보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러시아에 치명적 타격을 주려면 당연히 에너지 부문에 대한 금수 조치가 필요하지만 이를 단행할 경우 미국과 유럽에 미칠 후폭풍이 워낙 크다는 것이 서방이 처한 딜레마다.

◇ 에너지 수출이 전체 예산의 36%…"금수 안 하면 큰 효과 없어"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로 9조1천억 루블(약 1천190억 달러)을 벌어들였다.

국제 에너지 가격 폭등의 영향으로 수입이 원래 목표치보다 51.3%나 늘었다. 작년 10월 한 달 동안 벌어들인 수입만 1조1천억 루블에 달했다.

러시아 재무부는 애초 지난해 국제유가 평균을 배럴당 45달러로 예상했지만 유가가 급등하면서 평균 가격이 배럴당 69달러로 뛴 것이 수입 증가의 원인이었다.

지난해 러시아의 전체 예산이 25조2천900억 루블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전체 예산의 36%를 차지한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필요한 전쟁 비용의 원천이 됐다.

영국 싱크탱크인 경제회복센터(CER)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소요된 군비는 하루 평균 200억 유로(약 26조7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열흘이면 267조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원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가 없었다면 전쟁을 수행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서방이 러시아 주요 은행 7곳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시스템에서 퇴출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지만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에너지 부문에 대한 금수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국이 러시아에 가한 경제 제재는 범위가 넓고 깊어 주목할 만하긴 하지만 필수적인 것이 빠져 있다"며 "백악관이 당장 시작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인 에너지 금수 조치"라고 지적했다.

타임은 "러시아 예산의 36%를 차지하는 에너지 부문에 대한 금수 조치가 빠진 미국의 제재 패키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이빨 빠진 조치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러시아를 확실히 고립시킬 수 있도록 원유 수입을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리사 머코스키 공화당 상원의원은 3일(현지시간) "우리 달러가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고 있는 이 학살극의 돈줄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제재를 촉구했다.

조 맨친 민주당 상원의원도 "푸틴 대통령이 에너지를 무기화했다"며 러시아 원유의 미국 수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원유와 석유제품의 약 8%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이미 4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으로 지지율 하락과 함께 정치적 궁지에 몰려 있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가 물가 상승을 야기할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조치를 단행하려면 만만찮은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의 휘발유 가격을 상승시킬 수 있는 세계 에너지 공급 축소에는 전략적 이익이 없다"며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는 이미 10년래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오른 석유 가격을 더욱 상승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 인플레가 더 신경쓰이는 바이든…비협조적인 OPEC도 걸림돌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남짓 지났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최저 30%대까지 하락하면서 뚜렷한 전기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패색이 짙은 상황이다.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코로나19 방역 지침 혼선, 40년 만에 최고치까지 치솟은 인플레이션 등이 바이든의 지지율을 끌어내리고 있다.

특히 거의 모든 미국인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물가 폭등세가 치명적이다.

미국의 지난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7.5% 급등하면서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가 폭등세의 가장 큰 원인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에너지 가격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악화하며 지난 2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날보다 배럴당 6.95%(7.19달러) 급등한 110.6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2011년 5월 이후 거의 11년 만에 최고가다.

시장 전문가들은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까지 제재 대상에 포함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도 인플레이션 해결이 급선무인 바이든이 선뜻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카드를 꺼내기 어려운 이유다.

아직 에너지 부문은 제재하지 않았는데도 유가가 110달러를 돌파했는데, 에너지까지 제재 대상에 넣을 경우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바이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이던 지난 1일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한 국정연설에서도 시간의 상당 부분을 국내 경제 현안에 할애했다.

그는 "나의 최고 우선순위는 물가를 통제하는 것"이라며 해외 공급망을 국내 생산으로 돌려 근본적인 공급을 확대하도록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바이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인플레이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치솟는 유가를 잡기 위해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의 협조가 절실하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진 OPEC+는 미국에 비협조적이다.

OPEC+는 지난 1일 장관급 회담 후 발표한 성명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했지만 점진적으로 원유 생산을 늘린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추가 증산이 필요하다는 미국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OPEC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랜 기간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우방이었지만 바이든 취임 후 양국 사이가 틀어졌다.

바이든이 사우디 왕실을 비판해온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에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며 그와의 대화를 거부해온 것이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처하려는 미국의 외교적 노력이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진 중동에서 비틀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다른 OPEC의 주요 회원국인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도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이다.

안보 전문가인 알렉세이 무라비에프 호주 커틴대 교수는 호주 공영 ABC 방송에 "러시아는 지난 5∼6년 동안 중동에서 사우디, 카타르, UAE 등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며 "러시아가 수년간 공들여온 외교적 노력이 지금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유가를 좌지우지할 영향력을 가진 OPEC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따른 수급 불안으로 급등한 유가를 진정시키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이 난관에 부딪힌 상태라고 WSJ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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