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크라 국경에선] "선생님이 마지막 수업 때 곧 보자고…"

입력 2022-03-03 10:20
수정 2022-03-03 11:24
[지금 우크라 국경에선] "선생님이 마지막 수업 때 곧 보자고…"

고려인 나스티아 김씨, 15시간 기차타고 폴란드행

"총동원령에 징집된 남편 두고 와 내내 걱정"



(프셰미실[폴란드]=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2일 오후(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의 중앙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차로 피란한 우크라이나인으로 붐볐다.

붉은색 점퍼를 입고 역 출입구 바닥에 앉은 한 여성이 손에 휴대전화를 든 채 인파로 발 디딜 틈 없는 중앙홀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옆에는 자녀로 보이는 두 아이가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여성은 다소 어둡고 피곤한 듯한 얼굴이었는데 동양인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터뷰를 청했더니 옅은 미소를 보이며 흔쾌히 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의 성씨가 '김씨'라고 했다.

올해 35세인 나스티아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며 한국에서 온 기자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10여 년 전 작고한 할아버지의 성함은 '알렉산더 김'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서 남동쪽으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보야카에서 왔다는 그는 기차로 국경을 넘어 이날 이른 아침 프셰미실에 도착했다.

남매인 두 자녀와 함께 무려 15시간 동안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 열차 안에서 앉은 채로 추위에 떨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우크라이나인들과 마찬가지로 떠나야 할지 망설이다 뒤늦게 피란 열차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군이 키이우 근방까지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전황이 급속히 위태로워지면서 더는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6∼60세의 모든 우크라이나 남성은 총동원령으로 출국 금지된 터라 남편은 함께 나오지 못했다. 매일 전화 통화를 하며 남편의 안부를 확인하지만 근심이 가실 리가 없다.

전란 통에 아빠와 생이별한 아이들에 대해 측은함과 안타까움도 크다.

열 살인 막내아들 키릴은 "아빠가 곧 따라갈 테니 잘 지내고 있으라고 했다. 아빠를 빨리 보고 싶다"면서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살 많은 누이 크리스티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작년 말부터 온라인 수업을 받아왔는데 전쟁이 발발한 지난달 24일부터는 이마저도 못하게 됐다.

선생님은 전쟁이 터진 24일 아침 마지막 온라인 수업에서 '이제는 더는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게 됐다. 지금까지 훌륭하게 잘했다. 곧 다시 보자'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언제 다시 우크라이나의 교실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기약이 없다.

두 아이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느냐'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김씨는 두 아이와 함께 어머니가 있는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일 때문에 수년째 스페인에서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무작정 떠나온 피란길이라 언제 스페인행 비행기를 타게 될지는 모르며, 일단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로 가서 비행기표를 구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김씨는 "할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우크라이나에 정착하게 됐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고려인협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고려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22년부터라고 한다.

이후 1926년 소련 최초로 실시된 인구 조사 때 고려인 103명의 거소가 파악됐고 우크라이나가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뒤인 2001년 인구조사 때는 그 수가 1만2천700여 명까지 불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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