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억 희미한 유럽, 우크라 사태에 동요"
NYT "냉전 후 30년간 평화 누린 유럽, 안보 약점 노출"
"조지아 침공·크림 병합 등 러 과거 행보에 안이한 대응" 자성도
(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러시아가 촉발한 우크라이나 전운이 짙어지며 냉전 종식 후 30여년 간 평화에 취해 온 유럽이 동요하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위기를 겪으며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국방과 안보를 등한시하던 태세를 바꿔야 한다는 내부 자성이 일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고 NYT는 진단했다.
당장 마땅한 집단 안보 전략이 보이지 않은 데다 장기적 대응 방향도 뚜렷하지 않은 만큼, 이번 사태로 유럽 안보의 약점이 드러나는 중이라고 NYT는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우크라이나 위기 이전에도 러시아가 인근 지역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적 행보를 밟아왔지만, 그때마다 유럽의 반응은 미지근했다고 설명한다.
싱크탱크 유럽외교협의회(ECFR)의 울리케 프랑케 선임 연구원은 "유럽은 현상 유지 수준에 머무는 안보에 만족해왔고, 대부분 유럽인은 이같이 현 상황을 유지하려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서 "엘리트층은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지만, 대중은 (이런 안보 위기가)일상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2008년 8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놓고 갈등을 빚던 조지아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개시했으며, 2014년 친러 성향이 강한 주민투표를 근거로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다.
세계적 비영리 단체 오픈소사이어티 재단의 다니엘라 슈워처는 당시에도 러시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의존해왔던 독일이 이런 군사 행보를 보고서도 단호한 조치를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러시아의 군사적 행보가 접경 지역에 한정된다고 판단한 유럽 국가들은 대비 태세를 갖추지 않다가, 이번 우크라 사태로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릴 위험이 급격히 고조되자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슈워처는 "이번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충돌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이는 서방과 러시아의 직접적 충돌인데다 현재 유럽의 안보 질서가 더는 유럽에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식되어서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ECFR가 유럽연합(EU) 7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지난달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이전 사태들과 달리 이번 위기를 놓고는 상당수 유럽인이 안보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폴란드(73%), 루마니아(64%), 스웨덴(55%), 독일(52%), 이탈리아(51%), 프랑스(51%) 등 6개국 국민 상당수가 올해 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 같다고 답했다.
러시아가 실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경우, 나토가 적극 방어에 참여해야 한다는 응답은 7개 국가에서 평균 62%의 높은 동의를 얻었다. EU나 미국이 관여해야 한다는 응답도 각각 60%, 54%로 높게 나타났다.
영국의 전 국가안보보좌관인 피터 리케츠는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억제하지 않고 대화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믿음이 이번 사태로 크게 훼손됐다"면서 이번 위기가 유럽 자체 안보 전략보다도 군사동맹인 나토나 미국의 중요성을 상기해줬다고 짚었다.
EU의 '쌍두마차' 프랑스, 독일 정상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우려가 나오자 분주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오가며 외교전을 벌였지만, 긴장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외에도 각국이 금융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러시아의 군사 위협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이 우크라이나 인접국인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병력을 증파하며 대(對)러 억제에 앞장섰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나토 회원국들도 병력을 보태며 '러시아 대 서방'이라는 군사 대치 구도가 최근 형성되는 모양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의 위협적 발언과 병력 증강에 따라 유럽에서 군사 행동을 장기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이게 유럽의 '뉴 노멀'이라는 말을 하게 돼 유감"이라고 밝혔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로빈 니블렛 소장은 "이번 일은 EU가 관리하기 적합한 성격의 사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토를 유럽 안보의 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도 미국 없이는 유럽 안보가 여전히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미국의 안보 리더십이 무리 없이 이어질지 회의적 시각도 있다. 대러 전선에 나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하지 못하면 미국의 안보 리더십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대선을 준비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 공화당 후보가 차기 미국 대선에서 당선될 경우 미국은 세계 경찰의 임무보다도 자국 중심의 안보 전략을 다시 들고 나올 수 있다고 NYT는 예상했다.
싱크탱크 독일 국제안보연구소의 클라우디아 메이저는 "바이든 미 대통령 이후 누가 올지 모른다"면서 "이번이 미국이 유럽을 구해주는 마지막 경우일 수 있다"고 말했다.
pual0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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