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입력 2022-02-15 07:00
수정 2022-03-13 04:28
[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1932·1933년 수백만명 아사…"스탈린 정권의 의도적 민족말살"

인구 격감한 돈바스 러시아인 집단이주, 우크라 내전 불씨 돼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강대한 군사력을 지닌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일전불사의 결의를 다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당연히 부당한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가 바탕이 됐겠지만, 러시아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이를 확대 강화했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로선 러시아에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90년 전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대기근 속에 죽어간 '홀로도모르'(Holodomor)가 바로 그것이다.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또는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는 1932년과 1933년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량 아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오늘날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당시 아사자뿐만 아니라 기근과 함께 닥친 전염병의 희생자, 태어날 때부터 영양이 부실해 결국 삶을 이어가지 못한 영유아 등 홀로도모르가 직간접 원인이 돼 사망한 사람이 최대 2천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사망자 수는 200만명에서 700만명까지 다양하다. 통계가 부실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인데다 이 사건을 '반공산주의 선동'이라면서 한사코 부인한 소련의 통치가 6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자료가 사라지거나 왜곡됐기 때문에 아마도 정확한 피해 규모는 영원히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후대에 전승한 목격담과 소수의 외국인이 기록으로 남긴 비참한 이야기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 '피에 젖은 땅'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은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너무 끔찍해 인용은 생략한다.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산하 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홀로도모르 당시 식인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2천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왜 이 사건이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게 됐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일로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은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말살하려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마적 기획의 결과라는 인식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고 홀로도모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집단화의 부작용으로 생산력이 훼손돼 가던 터에 흉작까지 덮쳤다고 하더라도 수확된 곡물이 제대로 분배됐다면 대량 아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개별 농가와 집단농장을 뒤져 징발한 곡물을 외국에 수출했다. 종자까지 모두 빼앗긴 농민들이 이듬해 파종하지 못해 홀로도모르의 두 번째 해인 1933년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 당국은 '국내 여권'을 도입해 굶주림을 못 견딘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까지 막았다. 이중, 삼중의 억압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악명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이 뒤따랐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이 막 싹 트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려는 스탈린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한다.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다수는 몇 년 후 나치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오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나치군이 격퇴된 후 이들은 소련의 가혹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소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나치에 협력한 사실을 들어 홀로도모르를 '나치 부역자들의 날조'라고 선전했다. 소련의 해체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홀로도모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를 '민족말살'(Genocide) 범죄로 규정하자는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미국과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일부 국가가 호응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23년이 흐른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주민 비중이 가장 높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동부 2개주가 분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내전의 불을 댕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홀로도모르의 상처를 새삼 후벼파는 행위다. 홀로도모르가 없었더라면 합쳐서 돈바스로 불리는 이곳에 러시아인이 몰려들어 올 일도 없었다. 일할 만한 사람 대부분이 죽고 버려진 땅에 스탈린이 러시아인을 적극적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홀로도모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노력을 주도했던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7년 홀로도모르 75주년을 맞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의 러시아인들 역시 스탈린 압제의 희생자였다"면서 "이 시대의 러시아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은 이 범죄가 사실 그대로 알려지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썼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분별과 이성보다 원초적인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바스가 우크라이나의 목에 들이댄 칼이 된 지금 애써 묻어두려 했던 90년 전의 원한이 되살아나고 있다.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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