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70주년 영국 여왕 조촐한 기념식…석달여 만에 외부행사
케이크 자르고 지역 주민 등 만나…"여왕, 반짝였다"
6월에 대대적인 공식 기념행사 개최…현재 최장수 군주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즉위 70주년을 맞아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했다.
여왕은 즉위 70주년 하루 전인 5일(현지시간) 샌드링엄 별장에서 지역 봉사단체 대표들, 연금 생활자. 여성단체 회원 등을 만났다고 BBC와 스카이뉴스 등이 보도했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여왕은 밝은 표정으로 지역 주민이 만든 케이크를 잘랐다.
케이크에 쓰인 글자가 여왕이 아니라 사진 기자들을 향해 있었지만, 여왕은 웃으면서 상관없다고 말했다.
여왕은 대관식 때 쓰인 닭 요리 개발에 참여한 당시 요리학교 학생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전후 식량 배급 체제가 유지되던 때인 터라 외빈 접대용이지만 단순하고 재료가 비싸지 않은 요리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이날 여왕은 석 달 여 만에 처음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외부 대면 행사에 참석했다.
여왕은 작년 10월 19일 저녁 윈저성에서 주최한 글로벌 투자 정상회의 리셉션에서 1시간가량 지팡이도 없이 서서 존 케리 미국 기후특사, 빌 게이츠 등을 만났다가 다음 날 런던 시내 한 병원에 하루 입원했다.
이후 의료진 휴식 권고를 이유로 글래스고에서 개최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리셉션 등 대면 행사엔 참석하지 않았다.
작년 11월 참전용사 추모행사도 허리를 삐끗해서 얼굴을 비추지 못했고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성탄절 전 가족 오찬도 취소했다.
이날 한 리셉션 참석자는 여왕이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여왕이 최근 건강 우려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자유로웠고 지팡이는 걸을 때보다는 서 있을 때 몸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왕의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 공식 기념행사는 6월 2∼5일 연휴에 대대적으로 개최된다. 거리 파티, 군 퍼레이드, 팝 콘서트 등 다양한 축하 행사가 예정돼있다.
오는 7일엔 런던 곳곳에서 축포가 쏘아 올려지며 올해 축하 행사 시작을 알린다.
전날엔 왕실이 여왕이 20년 전 아이들의 그림이나 빅토리아 여왕이 1887년 받은 부채 등 예전 기념식 선물 등을 둘러보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선 여왕이 키우는 웰시 코기종 개 3마리 중 나이가 많은 '캔디'가 다가와 간식을 달라고 조르는 모습도 보였다.
즉위 당일은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기일이기도 해서 조용히 지나가곤 한다.
여왕은 1월 말부터 남편 필립공이 즐겨 머물던 샌드링엄에 와서 지내고 있다. 필립공이 작년 4월 세상을 뜬 뒤 여왕은 혼자서 즉위 기념행사를 치르게 됐다.
여왕은 1952년 2월 6일 세상을 뜬 조지 6세를 이어 예상 보다 일찍 왕관의 무게를 짊어졌다.
어린아이 둘을 둔 25세 젊고 아름다운 여왕의 등장을 영국인들은 크게 반겼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태어났을 때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미미했지만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버리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재위 70년을 넘긴 왕은 영국에선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루이 14세 프랑스,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요한 2세 리히텐슈타인 대공 등뿐이다. 현재 재위 군주 중엔 최장수다.
여왕은 오랜 기간 왕위를 지키면서 대영제국의 끝을 포함해서 굵직한 사회, 경제, 정치적 변화를 지켜봤다.
윈스턴 처칠부터 14명의 영국 총리를 겪었고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등 역사 주요 인물들을 만났다.
미국의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14명 중 린든 존슨 대통령만 제외하곤 모두 면담했다.
1999년엔 방한해서 안동 하회마을 등을 둘러봤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뜨거운 인기를 누리며 영국과 영연방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왕실은 영국의 막강한 소프트 파워이기도 하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치학 교수인 버넌 보그대너는 "여왕은 거의 비판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필립공과도 큰 잡음 없이 70년 넘게 해로했으나 자식들 문제로는 골치를 앓아왔다.
최근엔 손자 해리 왕자가 왕실을 떠난 뒤 부인 메건 마클이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아들 앤드루 왕자가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으로 고소를 당하며 왕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여왕은 아끼던 아들인 앤드루 왕자의 군 직함을 박탈하고 전하 호칭도 떼는 가슴 아픈 결정을 해야 했다.
손자 윌리엄 왕자는 호평을 받는 분위기지만 왕위를 바로 넘겨받을 찰스 왕세자를 향한 여론의 반응이 미지근한 점이 불안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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