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라지는 조선인 해저생매장 흔적…탄광 입구도 불명확

입력 2022-02-03 14:06
수정 2022-02-03 17:45
[르포] 사라지는 조선인 해저생매장 흔적…탄광 입구도 불명확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80년 맞아 현장서 추도식…한국 유족은 못 가

합숙소 건물은 폐허·화장장은 놀이터 돼…일본 시민단체 '안간힘'



(우베[일본 야마구치]=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어머니,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밑으로 갱도가 뚫렸고 어선의 '통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위험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탈출할 생각입니다."

일제 강점기 조세이(長生)탄광 수몰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원달 씨가 강제 동원 생활 중 어머니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3일 오전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의 해안에서 무심한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낭독됐다.

조선인 136명이 바다 밑에 생매장된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 발생 80년을 맞아 현지 시민단체 활동가 4명이 모여 참사 추정 시각인 오전 9시 30분께 사고 현장인 바다를 향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조세이탄광 물비상(水非常·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모임)은 모래밭에 준비한 제단에 조선인과 일본인 희생자 183명의 이름·출신지·사고 당시 나이를 기재한 촛불 모양의 랜턴을 사고 발생일을 표시하는 숫자 '1942·2·3' 형태로 늘어놓았다.



한국 소주와 일본 청주, 과일을 차리고 꽃을 바다를 향해 던지며 희생자의 영면을 기원했다.

모래밭에서 대략 100m쯤 떨어진 곳에는 직경 약 2.8m의 원형 콘크리트 기둥이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면 위로 솟아 있었고 바다 쪽으로 200m쯤 더 나간 곳에는 콘크리트 기둥이 하나 더 보였다.

이 지역에서 '피야'(ピ?ヤ)라고 불리는 이들 기둥은 조세이 탄광이 운영될 당시 배수구·배기구 등으로 사용됐다.

수몰 사고 당시를 목격한 생존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일제 강점기 벌어진 참사의 현장을 그나마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구조물이다.



고령 유족 입장에서 보면 피야는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기억조차 희미한 아버지 유해를 언젠가 발굴할 때 위치를 파악할 단서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겠다며 외국인의 방문을 사실상 금지해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 유족이 현장에 오지 못했고 피야는 외롭게 파도와 바람을 맞고 있었다.

모임은 이달 12일 정식 추모식을 다시 열고 이를 유튜브(https://www.youtube.com/watch?v=SZoM8Puaejg)로 중계할 예정이다.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의 약 74%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일대의 탄광이 식민지에서 수탈한 노동력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얕은 해저 탄광이었다.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아 일본인의 기피 대상이었고 일제와 결탁한 회사 측은 조선인을 강제로, 혹은 속여서 데려온 후 억지로 일을 시켰다는 것이 조세이 탄광의 참상에 대해 조사·연구한 이들이 내린 결론이다.



모임 공동대표인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씨는 유족의 이야기를 통해 근래에 이를 알게 됐다며 당시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사례를 기자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우베시에 살던 한 조선인의 10대 아들이 학교에 간다고 나간 후 실종됐는데, 조세이탄광 사고 몇 달 후 그가 탄광에서 사망했다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다.

만약 그 학생이 자발적으로 조세이탄광에 간 것이라면 집에 연락했을 텐데 소식이 끊긴 상태로 있었던 점에 비춰보면 납치하듯 데려가 일을 시킨 것이 아니겠냐고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추정했다.

사고 80년을 하루 앞둔 2일에는 모임의 도움을 받아 조세이탄광이 있던 일대를 돌며 당시의 역사를 간직한 흔적들을 살펴봤다.

재일교포 서정길(80) 씨가 조선인이 감시받으며 수용돼 있던 합숙소 건물로 기자를 안내했다.



젊은 시절 재일교포의 권리를 지키는 활동에 몰입했던 그는 강제 동원의 역사를 직시하겠다며 조세이탄광 합숙소에 들어가 업체가 작성한 여러 서류를 확보한 인물이다. 강제 동원의 실상을 밝히는 소중한 자료였다.

합숙소 건물은 도로에 접한 정면에서 봤을 때는 약간 낡은 창고처럼 보였는데 측면으로 가서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니 폭이 좁은 나무판을 겹치게 설치한 벽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내부를 감추려고 한 것인지 낮은 유리창에는 엉성하게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일부 유리창은 깨져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건물 내부가 보였다.

나무로 짜 맞춘 바닥이 심하게 훼손돼 구멍이 뚫려 있었고 흙과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배고픔과 매질 속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이 이런 곳에서 지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서씨는 "내가 예전에 들어갔을 때와는 다르게 돼 있다"며 내부를 개조해 쓰다가 방치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선인의 한이 서린 건물은 당시의 모습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조세이탄광을 운영했던 라이손(賴尊) 가문이 내부를 보존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들은 어두운 역사를 외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씨는 라이손의 후손이 근처에 살고 있는데 조세이탄광의 역사를 직시하는 활동에 "협조적이지 않다"고 토로했다.

합숙소로 사용되던 건물 옆에 공터가 있었다.



모임이 그간 수집한 자료나 증언에 의하면 화장장이 있던 자리다.

탈출을 시도하다 맞아 죽거나 질병으로 숨진 이들 등을 화장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장터 자리에는 놀이터가 조성돼 있었고 표지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놀이터를 끼고 합숙소 건물 맞은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무연고 묘에 관한 증언도 있었다며 어딘가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합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휘어진 철근처럼 보이는 금속성 물체와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가 수풀 사이에 방치돼 있었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갱에서 캐낸 석탄을 실은 탄차를 끌어당기는 권양기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여준 옛 사진을 보니 권양기는 튼튼하게 생긴 3층 구조물이었다.

8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탄광으로 들어가는 입구(갱구)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았다.

합숙소와 해변의 중간쯤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옛 모습이 제법 상태가 잘 보존된 계단이 있었다.

한때 이 계단이 갱구의 흔적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모임이 주도한 현지 조사에 참가한 한 주민이 탄광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의 일종인 '야미노카미사마'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그 주민은 계단에서 비스듬한 방향으로 20m 정도 거리에 갱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는데 그가 지목한 장소에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있었다.



모임은 조세이탄광과 규모가 비슷했던 다른 탄광의 갱구 사진을 참고용으로 그 자리에 설치해 놓았다.

인근에 누군가 갖다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목욕탕 욕조가 방치돼 있었다.

모임이 수시로 주변의 풀을 베거나 현장을 조사하며 역사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시민단체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손 가문 등 개인이 일대의 토지를 꽤 보유하고 있어 활동에 제약도 있다.

조세이탄광의 참사를 가장 잘 알려주는 시설은 모임이 일본 각지에서 모금 활동을 벌여 마련한 '조세이탄광 추도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가 설치돼 있다.

성명이 확인되지 않은 2명('그외 2명'으로 기재)을 제외한 조선인과 일본인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있고 피야의 모습을 본뜬 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한쪽 기둥에는 '강제 연행 한국·조선인 희생자'라고 적혀 있고 나머지 기둥에는 '일본인 희생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우리 아버지가 현장에서 일본인에게 괴롭힘당한 것이 아니냐. 일본인의 위령비를 향해 우리는 머리를 숙일 수 없다"며 한국 유족이 양국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은 위령비를 설치하는 것에 맹렬하게 반발했다고 설치 과정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소개했다.

광장에는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토지·재산 등을 잃어버려, 부득이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건너오거나, 혹은 노동력으로서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이라는 설명판이 설치돼 있었다.

일본 정부가 '징용을 강제연행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을 공식 견해로 채택하며 수탈의 역사를 감추려고 혈안이 된 것과는 대비되는 현장이었다.

광장 한쪽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된 홍보물과 방문자의 소감을 적을 수 있는 소통 노트가 있었다.

노트에는 "줄곧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오게 됐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이런 장소가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라고 일본어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반쪽만 적어 세계유산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도(佐渡) 광산보다 이 추모 광장이 방문자에게 더 의미 있는 깨달음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글이었다.

모임의 회원인 모리 노리후사(森法房·72) 씨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혐오 조장 발언)를 일삼는 사람이나 오려면 언제든 올 수 있지만 (자료나 노트가) 줄곧 소중하게 놓여 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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