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아베의 힘'에 굴복…7월 참의원 선거도 의식

입력 2022-01-28 19:07
수정 2022-01-28 19:25
기시다, '아베의 힘'에 굴복…7월 참의원 선거도 의식

기시다 "역사 문제 아베 내각 체제 계승"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추천할지를 놓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막판에 추천 '보류'에서 '강행'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시다 정부는 작년 12월 28일 문부과학상과 문화청 장관의 자문기구인 문화심의회가 내년 등재를 목표로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한 뒤 한국의 반발을 의식해 신중한 자세로 일관했다.

한국이 등재를 강력히 반대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진할 경우 국제 외교무대에서 한국과 격렬한 논전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올해 추천해도 등재 보장 못 한다"…한때 신중 모드

기시다 총리와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이 문화심의회의 선정 결과가 나온 뒤 이 문제에 대해 일관되게 밝힌 입장은 "종합적인 검토"였다.

등재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따져보고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기시다 총리는 27일 저녁 민영방송 TBS 인터뷰에서도 "올해 또는 내년 이후 중 어느 쪽이 등재 실현 가능성이 높은지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며 "냉정하게 논의해 많은 나라에도 이해토록 하면서 등재를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놓고 한국 반발을 고려해 내년 이후로 추천을 미룰 가능성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주무 부처인 외무성과 문부과학성 내부에서도 한번 추천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다시 등재를 추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올해 추천을 보류하고 다음 기회를 엿보자는 의견이 많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신중한 입장의 배경에는 일본이 주도한 자업자득 성격의 로비 활동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막기 위해 일본이 제도 개혁을 주도한 결과로 작년 4월 유네스코 가맹국에 의한 이의신청 제도가 도입됐다.

이 제도로 이의신청이 제기되면 당사국 간 대화로 해결될 때까지 세계기록유산등재 절차가 진행되지 않게 됐다.

그 후속 조치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도 같은 해 7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서를 제출하기 이전에 당사국 간 대화를 촉구하는 지침이 채택됐다.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 등재 심사 과정도 이 지침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대체로 이런 배경에서 기시다 정부가 무리한 선택을 피하고 한국과의 대화 방안을 모색하면서 내년 이후로 신청을 미룰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 기시다, 아베 등 강경파 입김에 '굴복'

기시다 정부가 올해 추천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온 지난 20일께부터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집권 자민당 내 보수 진영이 추천 강행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현 아베파)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작년 10월 기시다 정권 출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아베는 지난 20일 열린 파벌 회의에서 "(한국과의) 논전을 피하는 형태로 등록(등재)을 신청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며 기시다 총리를 압박했다.

또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년으로 추천을 미룬다고 해서 등재 가능성이 커지지 않는다며 한국과의 역사전(歷史戰)을 피할 수 없으니 추천을 강행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같은 날 파벌 모임에서도 총리 재임 당시 주한 대사에게 당부했던 말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역사전을 걸어오는 상황에서 싸울 때는 싸워야 하고, 나서야 할 때는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를 추종하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조회장도 연이은 기자회견과 국회 대정부 질문 등을 통해 "일본 명예와 관련된 문제"라거나 "(사도 광산이 있는) 니가타현 주민들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시다 정부를 몰아붙였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 역시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사도 광산을 둘러싼 한국 입장에 대해 "근거가 없고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등 강경 보수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추천 공세를 폈다.

이런 가운데 기시다 총리는 지난 2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관련 질의에"저의 내각에서도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에서 아베 신조 내각 이후 체제를 계승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자민당 일각에선 추천을 보류할 경우 올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을 지지하는 보수층 이탈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우익 성향의 일본유신회가 지난해 11월 치러진 중의원 총선에서 원내 제3당으로 약진했다.

또 산케이신문이 계열 민영방송 FNN과 공동으로 지난 22~23일 18세 이상 남녀 1천52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3.8%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추천해야 한다고 답했다. 추천해서는 안 된다는 답변은 33.9%였다.

◇ 아베 힘 과시…"한국 불신감 크다"는 방증 지적도



기시다 총리가 막판까지 저울질하다가 대다수 언론의 예상을 깨고 추천 강행을 선택함으로써 아베의 힘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병을 이유로 2020년 8월 임기 중 총리직에서 물러난 아베는 지금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수장으로서 국가 주요 현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번 사도 광산 문제가 그의 뜻대로 귀착된 것은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등 기시다 정부가 당면한 주요 현안에서도 아베의 입김이 한층 강해질 것임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 대한 기시다 정부의 강한 불신감이 추천 강행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징용 피해자 및 위안부 문제를 놓고 한국이 과거에 합의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시다 정부가 한국과 대화로 타협안을 찾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관계 악화를 한층 더 감수하면서 추천 카드를 빼 들었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이후 국회 연설에서 "중요한 이웃 나라인 한국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토대를 두고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하겠다"는 발언을 되풀이했다.

한국 법원의 일제 징용 및 위안부 배상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따라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대책을 한국 정부에 계속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강경 보수파가 득세하는 자민당의 문제가 노정됐다는 지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오쿠조노 히데키(奧園秀樹)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한국 측 항의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기시다 정부가 추천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릴 경우 저자세 외교로 인식돼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추천 강행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면서 사도 광산 문제를 둘러싼 기시다 정부의 선택과 자민당 움직임에 실망했다고 했다.

사도 광산 문제의 본질은 세계유산 등재 여부인데, 아베나 다카이치 같은 자민당 내 주류 세력이 '역사전'까지 표방하면서 한국과 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오쿠조노 교수는 "일본은 사실상 자민당 일당 체제"라며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정당 안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약해져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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