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대형 참사로 취임 23년만에 벼랑끝에 선 정몽규 HDC그룹 회장
1999년 현대차 회장서 현산 회장으로…건설업 확장보다 다각화 치중
'총체적 안전불감증' 여론 뭇매…최대 위기에 조만간 거취 결정 전망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HDC현대산업개발이 광주에서 두 건의 대형 건설 현장 안전사고를 일으키면서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1999년 회장 취임 이후 23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국내 상위 10위권 대형 건설사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는' 수준의 대형 참사를 연달아 내면서 총체적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데다 '아이파크' 브랜드의 신뢰도도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산업개발의 수주 사업장에서는 조합원들의 계약 파기 요구가 잇따르고, 향후 신규 수주에도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해지는 등 이번 사태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오너인 정 회장의 책임론도 거세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정 회장이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지고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자신의 거취 문제도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정 회장, 20여 년간 사업 다각화에 더 관심…현대산업개발은 퇴보
16일 재계에 따르면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현대차 회장까지 지낸 '자동차맨'이었다. 선친이자 현대차 '포니 신화'의 주인공인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차의 발전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장자인 정몽구 회장에게 자동차의 경영권을 물려줬고 정세영, 정몽규 회장 부자는 1999년 3월 현대산업개발을 물려받았다.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정 회장은 당시 건설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자동차 경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영향으로 정 회장은 현대산업개발 회장 취임 이후 현대산업개발을 더 키우기보다는 2006년 영창악기 인수를 필두로 건설 외 다른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서울 용산 민자역사 개발 사업 추진으로 떠안게 된 용산 아이파크몰을 직접 운영하면서 유통업에 진출했고, 2015년에는 호텔신라[008770]와 함께 면세점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건설 외 다른 사업 발굴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한 방'이 없었던 정 회장은 2019년 미래에셋대우와 함께 아시아나항공[020560] 인수전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뛰어들었다. 못다 한 '모빌리티' 기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자동차) 출신인 정 회장은 경기나 정책에 민감한 건설산업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데다 모빌리티 사업에 대한 갈망도 컸던 것으로 안다"며 "아시아나항공이 자신이 못다 이룬 자동차 사업에 대한 꿈을 대신해줄 회사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혔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영난이 악화되자 자칫 모기업이자 '캐시카우'인 현대산업개발까지 부실해질 수 있다는 안팎의 우려가 커졌고, 결국 매끄럽지 못한 과정으로 인수를 포기해 논란이 됐다.
정 회장의 관심이 주로 다른 곳에 쏠린 사이 현대산업개발은 건설시장에서 퇴보했다.
경쟁사들이 중동 플랜트나 개발사업 등 해외로 눈을 돌릴 때 현대산업개발은 국내에서 '아이파크'를 앞세운 주택사업에만 주력했다.
현대그룹에서 분리되기 전인 1998년 시공능력평가(도급순위) 6위였던 현대산업개발은 '삼성동 아이파크' 입주가 시작된 2004년 한 때 시공능력평가 4위까지 오르며 '톱5' 대열에 들어섰지만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
2014년에는 도급순위가 13위까지 떨어지며 10대 건설사에서 밀려났고, 현재는 9위 자리에 턱걸이해있다.
주택사업에서의 위상과 존재감도 예전보다 약해졌다는 평가다.
한때 강남권 재건축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2004년 입주한 '삼성동 아이파크'가 강남의 명품 아파트로 부상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급등하기도 했지만 그 기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정 회장은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재건축·재개발 수주전에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다른 대형 건설사에 '텃밭'이나 다름없던 강남을 내줬고, 아이파크의 브랜드 가치도 떨어졌다.
정 회장은 건설 CEO보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더 왕성히 활동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2013년 제52대 축구협회장으로 취임한 정 회장은 지난해 1월 '3선'에 성공하며 9년째 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다.
◇ '아파트 명가'에서 '나쁜 기업' 오명까지…최대 위기에 몰린 정몽규
건설업계에서는 지난해 광주 학동 참사로 오너가 직접 사과하는 사태가 빚어졌는데도 대형 사고가 재발한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현대산업개발의 안전 관리와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학동 철거현장 붕괴 정도의 대규모 참사면 온 회사의 현장소장이나 관련 임원이 안전사고 재발시 옷을 벗겠다는 각오로 비상이 걸려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라며 "불과 7개월 만에 상식 밖의 사고가 또 발생했다는 점에서 회사 시스템 전반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지난해 6월 광주 학동 현장에서 사과한 이후 현대산업개발은 '스마트 안전보건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건설업계는 "형식적 수준이고 획기적인 대안은 없었다"고 평가 절하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회장이 건설업은 돈 벌어주는 캐시카우 정도로 생각하고, 사업다각화를 명분으로 다른 업종에 관심을 보이면서 축구협회장 일에 더 열성이니 직원들이라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겠느냐"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해 6월 학동 재개발 참사 이후 현대산업개발은 당시 현장소장이 기소된 것 외에 사고 발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경영진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권순호 대표이사가 퇴임했지만, 학동 참사에 대한 문책성으로 보긴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권 전 대표이사의 후임으로 임명된 유병규 대표는 건설·안전 전문가가 아닌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장을 지낸 학자 출신으로 2018년에 현대산업개발에 왔다.
정 회장과 현대산업개발은 잇단 광주 참사로 최대 위기에 내몰렸다.
지난 13일 이용섭 광주시장은 현대산업개발에 대해 "우리 입장에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참 나쁜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아파트 명가'로 불리던 회사가 '나쁜 기업'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번 사고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화정아이파크 입주민들이 전면 철거후 재시공을 요구하면서 공사비와 피해보상비 등에 당장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업 신뢰도 저하에 따른 손실은 액수로 환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광주 운암 등 기존 수주 현장에서는 계약 해지 요구가 빗발치고, 기존 아파트 주민들은 단지명에서 '아이파크' 브랜드를 떼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공공은 물론 재건축·재개발 사업 등 신규 수주에도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시민·노동단체 등과 여론이 악화되면서 현대산업개발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고 관련 책임자 처벌을 비롯해 영업정지 등의 중징계가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정 회장은 지난해 6월 학동 참사 직후 현장에서 직접 사과문을 발표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아직까지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자신의 거취 문제를 숙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을 비롯해 회장 취임 23년 만에 경영퇴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 건설업계 종사자는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될 정도로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큰 상황에서 잇단 사고로 현대산업개발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조직과 임직원들의 뼈를 깎는 '환골탈태'의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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