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조선인 징용 현장 사도광산…"하루하루가 공포였다"
사도광산 관리회사 "전쟁 땐 법에 따라 동원된 것, 일본인과 같은 취급" 억지
조선인 도망자 존재는 강제노역 증거…민족차별 원인 노동쟁의도
(사도섬[일본 니가타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일본 니가타(新潟)현에 있는 항구에서 쾌속선으로 70분을 달리면 태평양전쟁 기간 조선인 징용 현장이었던 사도(佐渡)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섬에 있는 사도광산에는 2천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의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검토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사도광산은 아이카와 금은(金銀)산과 쓰루시 은(銀)산, 니시미카와 사금(砂金)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에도(江戶)시대(1603년~1867년) 때부터 세계 최대 규모 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아이카와 금은산에 태평양전쟁 기간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돼 구리와 철, 아연 등 전쟁 물자를 채굴했다.
연합뉴스는 3일 아이카와 금은산을 비롯한 사도광산 유적군을 방문했다.
1989년 폐광 이후 지금은 관광지가 된 아이카와 금은산의 입구에 들어서면 에도시대 갱도와 메이지(明治)시대(1868년~1912년) 이후 이용된 갱도의 갈림길이 나온다.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하고 좁은 에도시대 갱도에선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졌고, 비교적 넓게 매끈하게 뚫린 메이지시대 이후 갱도에선 기계화 장비가 사용됐다고 한다.
현재 눈에 보이는 사도광산 시설은 대체로 메이지시대 이후의 모습이다.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작성한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광산 유산군' 소개 자료를 봐도 아이카와 금은산 수직갱도(1877년·이하 완공연도)와 아이카와 부유선광장(1938년), 오마항(1892년), 도지가와 제2발전소(1919년) 등 9개 소개 유적 중 4개가 메이지시대 이후 완공됐다.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도 "(메이지시대) 구미(歐美)에서 도입된 선진적 광업 기술로 인해 금은 생산량이 대폭 증가해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적인 광산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소개했다.
2010년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 추천 잠정 목록에 포함될 때만 해도 메이지시대 이후 시설이 포함됐지만,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2019년부터는 일본 문화청에 제출한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추천서에서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까지로 한정했다.
사도광산 관리회사인 골드사도㈜의 고노 마사토시 사장은 3일 사도광산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메이지시대 산업시설은 규슈(九州)에도 있고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기 때문에 사도광산의 보편적 가치를 고려해 에도시대로 한정했다"고 설명했다.
고노 사장은 사도광산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는 수작업으로 금을 채굴해 광산 마을에서 금화까지 제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에도시대 금 생산 체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메이지시대 이후 시설은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고노 사장은 한국 정부가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이라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약 1천600명의 조선인이 사도광산에서 일한 것으로 안다"며 처음에는 모집 형태로 왔고 태평양전쟁 기간 총동원령 이후에는 관련 법률에 따라 동원된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일본인도 같은 법률에 따라 동원된 것이고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노 사장의 주장과 달리 모집에 응해 사도광산에 온 조선인은 자유의사에 따라 그만둘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드러난 바 있다.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에 대해 연구한 히로세 데이조(廣瀨貞三) 일본 후쿠오카(福岡)대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여섯 차례의 모집으로 1천5명의 조선인이 사도광산에 동원됐다.
그런데 1940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사도광산에서 도주한 조선인 노동자는 148명이었다. 1천5명 기준으로 14.7%가 도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도망자가 많은 것은 조선인이 자유의사로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자료에 등장하는 사도광산 조선인 징용 노동자 임태호(1997년 사망)의 구술 기록에도 당시 가혹한 노동 환경을 엿볼 수 있다.
임태호는 1940년 11월 모집 형태로 사도광산에 왔지만 도착해서 징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지하에서 광석을 채굴하는 일을 했는데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고 증언했다.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조선인 도망자 중 한 명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고노 사장의 주장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히로세 교수는 지난 10월 23일 강제동원 관련 온라인 강연에서 '운반부'와 '착암(바위에 구멍을 뚫음)부' 등 갱도 내 위험한 작업에 조선인이 투입되는 비율이 높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조선인 노동자 모집 당시 근로조건이 전달되지 않은 문제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 돼 노동쟁의가 두 차례 발생했다고 히로세 교수는 전했다.
히로세 교수는 지난달 29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염두에 두고 "역사에는 반드시 밝은 쪽과 어두운 쪽 양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 측이 어두운 부분을 배제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직시해야 한다.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내달 1일까지 유네스코에 정식으로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할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일본 측은 2015년 조선인 징용 현장인 군함도(일본명 하시마)가 포함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 한국 등이 반발하자 희생자를 그리는 전시시설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작년 6월 도쿄에서 개장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전시시설에는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강제노동이 없다는 전 군함도 주민 등의 증언을 위주로 전시돼 논란이 됐다.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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