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위기때 부시가 자위대 파견 요청…日, 헌법 내세워 불응

입력 2021-12-22 14:27
수정 2021-12-22 17:41
걸프위기때 부시가 자위대 파견 요청…日, 헌법 내세워 불응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으로 본격화한 걸프 위기 때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하 당시 직책)이 일본 정부에 자위대 파견을 통한 후방 지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간 미국이 이 같은 요구를 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미국 대통령이 직접 요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교도통신이 22일 기밀문서에서 해제된 1990년 전후의 일본 외무성 자료 등을 근거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1990년 9월 29일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미국 주도 다국적군의 이라크 공격을 전제로 "일본이 포시스(FORCES·자위대)를 참가시키는 방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자위대 파견이) 도움이 되고 세계로부터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도통신은 미일 정상회담 내용을 기록한 극비문서에 있는 부시 대통령의 이 발언은 중동에 자위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부시는 이 정상회담에 앞서 그해 8월 14일 가이후 총리와 가진 전화회담 때도 "자위대에 기뢰 제거와 장비(무기) 수송을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이후 총리는 부시와 가진 일련의 회담에서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 무력 행사를 금지한 헌법 9조를 준수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후방 지원 요청에 불응했다.



가이후 총리는 다만 "(피가 아닌) 땀을 흘리는 협력을 하고 싶다"고 부시의 요구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 일본 입장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일본 정부는 당시 비군사조직인 유엔평화협력대를 창설해 자위대원을 일부 참여시키는 타협책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유엔평화협력대 설립 근거를 담은 법안이 일본 국내 여론의 반발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는 바람에 그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은 결국 이듬해 1월 17일 미국 주도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걸프전쟁의 후방지원 부대로 자위대를 파견하지 않는 대신에 다국적군 등에 130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원을 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해 이 가운데 90억 달러의 추가 지원분이 미국 측 요구에 응하는 형식으로 제공된 사실도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복수의 전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이 요구했던 추가 지원액의 산정 근거가 전혀 없었다며 요구하는 대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일본은 이 전쟁이 끝나고는 전후 공헌 활동을 명분으로 걸프 지역에 소해정을 파견해 미국을 지원했다.

이와 관련해 교도통신은 부시 대통령의 당시 요구가 일본 안보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실정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 정부가 일본에 이라크에 대한 무력 공격 계획을 사실상 통지해 준 시점은 개전 사흘 전인 1991년 1월 14일로 밝혀졌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한 나카야마 다로(中山太?) 외무상에게 "미국인이 피를 흘리게 된다"는 에두른 표현으로 걸프전쟁 개시 계획을 알렸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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