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의대 연구진 "탄저균 독소의 통증 차단 효과 확인"
맹독성 탄저균 단백질 2종, 신경세포에서 통증 신호 바꿔
암 치료ㆍ대상포진 등의 심한 통증, 비마약 치료 '청신호'
저널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논문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현재 통증 완화에 가장 효과적인 약은 오피오이드(Opioid)다.
오피오이드는 아편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합성 진통제를 말한다.
하지만 이 약은 부작용이 심하다. 뇌의 보상 체계를 교란해 중독성이 강한 데다 치명적인 호흡 곤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비마약성 통증 치료법 개발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 하버드대 과학자들이 뜻밖에도 탄저균(anthrax bacillus)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냈다.
폐에 치명적인 감염증을 일으키는 탄저균은 테러 무기로 쓰일 만큼 위험한 세균이다.
하지만 특정 유형의 탄저균 독소는 통증을 완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독소는 통증 지각 뉴런(신경세포)의 통증 신호를 바꿔 아예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하버드 의대 블라바트닉 연구소의 아이삭 츄(Isaac Chiu) 면역학 교수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20일(현지 시각) 저널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에 논문으로 실렸다.
츄 교수팀은 오래전부터 미생물과 신경ㆍ면역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해 왔다.
앞서 다른 병원성 세균에 관한 연구에선 박테리아가 뉴런의 신호를 바꿔 통증을 증폭한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세균이 통증을 차단할 수 있는지를 연구한 사례는 별로 없다.
연구팀은 유전자 발현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의 통증 지각 뉴런이 다른 뉴런과 어떻게 다른지부터 확인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실마리가 나왔다.
다른 유형의 뉴런엔 없는 탄저균 독소 수용체를, 통증 감각 섬유(Pain fibers)가 갖고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이는 통증 감각 섬유가 탄저균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는 의미다.
통증의 차단은, 배근 신경절의 지각 뉴런이 탄저균이 생성하는 2종의 단백질과 결합할 때 이뤄졌다.
배근 신경절은 통증 신호를 척수에 중계하는 신경 조직이다.
탄저균이 만드는 단백질 중 하나인 '방어 항원(PA)'이 신경세포 수용체와 결합하면 세포막에 통로 역할을 할 미세 구멍이 생겼다.
그러면 다른 2종의 탄저균 단백질, 즉 '부종<浮腫> 인자(EF)와 '치사 인자(LF)'가 이를 통해 신경세포 내로 전달됐다.
EF와 LF를 묶어서 '부종 독소'라 하는데 이 독소가 신경세포 내의 신호를 바꿔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연구팀은 부종 독소의 통증 차단 작용을 인간의 신경세포 실험과 동물 생체실험에서 모두 확인했다.
실제로 아래쪽 척추에 이 독소를 주입한 생쥐는 뜨거움이나 기계적 자극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생쥐의 다른 생명 징후(vital signs), 즉 심장 박동, 체온, 운동 조절 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는 통증 감감 섬유를 표적으로 삼아 몸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은 채 통증을 차단하는, 매우 정밀하고 선별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탄저균 독소를 투여한 생쥐는 두 가지 유형의 통증, 즉 염증으로 인한 통증과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한 통증이 완화됐다.
이런 통증은 외상성 손상, 대상포진 바이러스 감염, 당뇨병 합병증, 암 치료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유형이다.
연구팀은 또 탄저균 단백질로 디자인한 운반체에 다른 통증 차단 물질을 실어 신경세포에 전달해도 통증이 사라진다는 걸 확인했다.
이렇게 전달된 물질 중에는 '보톡스(Botox)'로 널리 알려진 보툴리눔 독소(botulinum toxin)도 들어 있다.
혐기성 세균인 클로스트리움 보툴리눔이 분비하는 이 단백질은 맹독성 신경마비 물질이나, 극미량만 투여하는 방법으로 과도한 근육 수축 치료, 미용 시술 등에 쓰이고 있다.
이 기술은 장차 다른 단백질 치료제를 특정 표적에 전달하는 정밀 의료 시술에도 적용될 거로 기대된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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