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판결에 기업들 비상…"엄청난 리스크·부도 맞을 수도"
업계 "인건비 부담 우려…신의칙 적용 여부 판결마다 달라 큰 혼란"
경영계 "더욱 노조 눈치 볼 수밖에 없어" 불만 고조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김영신 권희원 기자 = 대법원이 16일 정기적으로 지급된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자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경영 상황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판결대로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가중돼 경영 불확실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그간 비슷한 소송에서 사측의 방어 수단으로 활용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이번에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업들은 더욱 궁지에 몰린 모양새다.
◇ 현대重 6천300억원·미포조선 868억원…업계 '우려·불안'
기업들은 우선 이번 소송 결과 한꺼번에 지급해야 하는 금액의 규모에 놀라는 분위기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이 이번 판결로 노동자 3만8천여명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은 6천300억원에 달한다.
이날 대법원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또 다른 조선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의 통상임금 사건도 유사한 취지로 파기환송 했는데 이 업체가 지급해야 할 금액은 868억원이다.
아직 파기환송심이 남아있어 실질적 지급까진 시일이 걸리겠지만 현대중공업그룹은 판결에 따른 예상 지급분을 이번 분기 실적에 공사손실충당금으로 설정할 계획이라 재무제표상 대규모 적자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통상임금 분쟁을 10년간 겪어온 기아도 지난해 대법원이 노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수천억원 가량을 추가로 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중공업계 관계자는 "수주를 못 하면 먹거리가 없는 조선 등 업계 입장에서는 몇천억원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는 자체가 엄청난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통상임금 소송으로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판결로 인해 업계 전반에서 인건비 부담이 늘 것을 걱정하는 기류도 읽힌다.
통상임금은 초과근무나 휴일근무수당 계산, 퇴직금 산정시 기준이 되기 때문에 향후의 임금 비용 증가는 불가피하다. 특히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이 긴 조선,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관계자는 "통상임금 판결 이후에 입사한 직원들은 더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받을 가능성이 커 선배들과 형평성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선이나 중공업, 자동차 이외의 다른 업계에서도 전반적인 부담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한 업계 임원은 "원자재 가격 급등과 인플레이션 등으로 전반적으로 위기 상황이고, 산업 전환기를 맞아 연구·개발(R&D)에 투자해야 하는 시기에 기업 부담이 더욱 가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판결마다 엇갈린 '신의칙'…"논란 부추길 소지 커"
통상임금 소송의 핵심인 신의칙이 판결마다 달리 적용된 점에 대해서도 경영계에서는 불만을 쏟아냈다. 확실한 판례가 없어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고, 이로 인한 경영 불확실성도 여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7월 대법원은 한국GM과 쌍용차 노동자들이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선 신의칙을 적용해 회사 손을 들어줬다.
통상임금 기준으로 노동자들이 수당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소급분 지급으로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면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칙에 위배된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하지만 한국GM과 쌍용차 판결 이후 한 달 만에 나온 기아 노사의 통상임금 소송이나 이번 현대중공업 노사의 소송에서는 이 원칙이 인정되지 않았다.
임금 지급으로 회사 존립이 위태로워지지 않고, 그 어려움이 일시적이거나 예견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특별한 기준 없이 신의칙 적용 여부가 갈리는 것은 기업 경영 리스크만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논평에서 "대법원은 사용자가 경영 상태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기존 신의칙 판단 기준을 더욱 좁게 해석하며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도 "이번 판결에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아 통상임금 관련 소모적인 논쟁과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논평했다.
◇ "노조 눈치 더욱 볼 수밖에 없어"…통상임금 소송 잇따를 가능성도
기업들은 노사 협상 과정에서 이번 통상임금 판결이 노측에 유리한 지렛대로 작용해 사측이 현저히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한다.
김용춘 한경연 고용노동팀장은 "해고자 노조 가입, 비종사자의 사업장 출업 허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노조 편향적 정책이 강화돼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이번 판결도 노조 측에 유리하게 나왔다"며 "기업들이 더욱더 노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경우 근로자에게 일시금을 지급하면 끝날지 모르지만, 통상임금 협상을 아직 끝내지 못한 중소형 조선사는 앞으로 인건비 부담이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통상임금 관련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경영계에는 큰 부담이다.
삼성전자[005930]와 LG전자[066570]는 대법원의 앞선 통상임금 판결을 반영해 2014년부터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노조가 통상임금·포괄임금 산정 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갈등의 소지가 불거진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 노조가 지난해 12월 '불합리한 통상임금 산정 방식 때문에 미지급된 임금을 정산하라'고 주장하며 직원 4천여명을 모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회사가 올해 4월 일부 직군에 한해 일부 수당을 통상임금으로 포함하기로 하고 재산정·지급을 결정한 바 있다.
삼성전자 노조도 통상임금 산정 방식에 대해 직원들을 상대로 의견을 수렴하며 소송 제기를 검토하고 있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성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면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로 거액의 충당금이 설정되면서 당장의 실적에는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불확실성 해소나 직원 사기 고조에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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