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In] 미국 압력에도 산유국 요지부동…유가 어디까지 오르나

입력 2021-11-06 05:20
[이슈 In] 미국 압력에도 산유국 요지부동…유가 어디까지 오르나

OPEC+, 미국 추가 증산 요구 '퇴짜'…"기존 속도 고수"

세계 각국 인플레 비상…BoA "유가 120달러까지 오른다"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산유국 카르텔인 OPEC+가 미국의 추가 증산 요구를 거부하면서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 장기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OPEC+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다.

최근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 참패로 다급해진 조 바이든 행정부는 어떻게든 유가와 인플레를 잡으려 하고 있지만 OPEC+를 주도하는 사우디와 러시아는 유가가 오르면 유리한 입장이라 미국과 타협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 OPEC+ 추가 증산 거부에 美 "경제회복 위태롭게 해"

4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OPEC+는 이날 석유장관 회의를 열고 매달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하기로 한 계획을 다음 달에도 유지하기로 했다.

OPEC+는 지난해 합의했던 감산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지난 8월부터 매달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하기로 했는데, 내달에도 이런 증산 규모를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OPEC+가 이런 결정을 하자 추가 공급을 압박해온 미국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에밀리 혼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대변인은 4일 성명에서 "OPEC+가 증산을 가속화하기를 거부해 세계 경제 회복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며 "미국은 연료 가격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혼 대변인은 이어 "글로벌 경제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상황이지만 OPEC+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힘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반면 OPEC+ 회원국들은 추가 증산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압둘아지즈 빈살만 사우디 에너지 장관은 최근 에너지 가격 상승과 관련해 "원유가 원인이 아니라 천연가스와 석탄 가격의 급격한 상승이 경제적 우려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10월 유럽에서 원유 수요가 감소할 조짐이 있었으며, 델타 변이 확산으로 인한 세계 원유 수요 감소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추가 증산을 하지 않기로 한 배경을 설명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가 오랜 기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중동 동맹국 중 하나였으나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됐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의 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 정부는 지난 2월 사우디 왕실을 비판해온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에 무함마드 왕세자가 있다는 정보당국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크리스티안 말렉 JP모건 애널리스트는 "미국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속도를 내면서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실세인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사우디 리야드까지 날아가 추가 증산을 요청했는데도 결국 실패한 것도 악화한 양국 관계를 방증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고유가·인플레로 타격 입은 바이든…"유가 120달러까지 오를 것"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붕괴에서 비롯된 물가 폭등세는 정치 지형마저 뒤흔들고 있다.

지난 2일 민주당의 예상 밖 참패로 끝난 미국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가 대표적이다.

올해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여겨진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글렌 영킨 후보가 당선되자 바이든의 거듭된 실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CNN이 실시한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번에 버지니아주 유권자들이 가장 중시한 이슈는 경제 및 일자리(33%)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한 성장률 둔화, 물류 대란과 물가 상승 등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선거 결과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은 60%나 급등했고, 소비자물가지수(CPI)는 9월까지 5개월 연속 5%를 상회했다.

미국 공화당은 갤런당 3.40달러까지 치솟은 휘발유 가격을 예로 들며 바이든의 에너지 정책이 미국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요 에너지 가격과 인건비가 오르자 맥도날드, 코카콜라, P&G 등 미국의 대표적 소비재 기업들은 최근 줄줄이 제품가 인상 계획을 발표해 인플레 우려에 기름을 부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밀어붙였다.

취임 첫날 행정명령으로 '키스톤 XL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허가를 취소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키스톤 XL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는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미국 텍사스주까지 송유관을 연결해 하루 8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는 사업이다.

약 90억 달러를 들여 총 길이 1천800㎞의 송유관을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지만 환경단체들은 이 사업이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등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반대해왔다.

취임 초부터 전통적 화석연료 산업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취해온 바이든이지만 최근 에너지 위기와 함께 인플레 우려가 커지자 조금씩 태도가 바뀌고 있다.

FT는 미국 정부가 유가 상승세를 잡기 위해 전략비축유 방출을 고려하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 내 일부 석유 생산업체와 접촉해 얼마나 빨리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지 문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시장분석업체 IHS마킷의 대니얼 예르긴 부회장은 "치솟는 화석연료 가격에 대한 우려는 에너지 안보와 신뢰성을 에너지 전환과 동일한 의제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이 사우디와 러시아를 완전히 통제하기 어렵고 에너지 성수기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당분간 유가 상승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내다봤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보고서에서 내년 6월 국제유가(WTI 기준)가 배럴당 12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BoA는 지난 9월 중순 내년 국제유가를 배럴당 100달러로 예상하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를 한 달여 만에 수정한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에 대해 "원유뿐 아니라 석탄,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위기가 발생한 것이 유가 전망치를 올린 이유"라고 분석했다.

골드만삭스는 "수년간 이어지는 구조적인 상승 장세의 시작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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