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전 대사 "신뢰는 협상의 기초…美, 먼저 움직여야"
"바이든, 자신감 없는 듯…리스크 각오하는 용기 내야"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인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94)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 비핵화의 첫 단추라고 조언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22일(현지시간) 뉴욕주(州) 아몽크 자택에서 진행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비핵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접근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일부라도 먼저 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신뢰는 모든 협상의 기초이지만, 단지 테이블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라고 말하는 식으로는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먼저 제재를 해제할 경우 북한이 원하는 것만 챙기고 비핵화를 진척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미국은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가 있다"고 반응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이든은 아직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힘과 권한을 사용하는데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면서 "바이든이 좀 더 자신 있게 추진력을 보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이 이미 확보한 핵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북한은 자신들이 개발한 핵 능력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비관론을 경계했다.
미국이 북한을 완전하게 파괴할 정도로 공격할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북한으로선 사용하지 못할 핵 능력을 쥐고 있는 것보다는 결국 포기할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은 대북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전부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북한이 결국 핵 능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실제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점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바이든 행정부는 과거 행정부보다 좀 더 리스크를 짊어지고, 좀 더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해 그레그 전 대사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그는 "훌륭한 개념이지만, 종전선언을 실제로 이뤄내기 위해선 국제사회의 지지와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직 종전선언과 관련해 미국 내부의 반향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선 지금까지 미국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현재 북한이 손에 쥐고 있는 협상 카드 자체는 크게 좋지 않다"면서 "그러나 북한은 좋지 않은 협상 카드를 가지고도 나름대로 훌륭하게 난관을 헤쳐나왔다"고 말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197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했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관 등을 거쳐 1989년부터 주한미국대사를 지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미국 정부를 통해 구명운동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증인으로 꼽힌다.
뉴욕 외곽의 전원 지역에서 평화로운 노년 생활을 지내고 있는 그레그 전 대사는 인터뷰 도중 내년 한국 대선이 언급되자 "한국의 젊은 리더들에 대해 알고 싶다"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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