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인플레 확산에 돈줄 죄는 중앙은행들
물가 상승세 '일시적 아니다' 여론 점차 우세
중앙은행들 기준금리 인상·양적완화정책 되돌리기 나서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인플레이션 우려가 전 세계적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물가 상승세가 뚜렷해지고 에너지 대란마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 장기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물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 채권 매입 축소 등 긴축적인 통화정책에 속속 나서고 있다.
◇ 물가 상승세 장기화 우려 커져
17일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로 5.4%로 올라 5개월 연속 5%대를 이어갔다.
9월 물가 상승률은 올해 6월, 7월 상승률과 같지만 이는 2008년 8월 이후 최대 상승률로, 물가의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들의 '희망'은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심지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위원인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마저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최근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주최로 열린 한 행사에 연설할 당시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쓰인 유리병을 꺼내 들며 이 '금기어'(dirty word)를 사용할 때마다 1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는 주장은 최근 물가 상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야기한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다는 논리다.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주요 항만이 일시적으로 운영이 중단돼 물류 대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물류비용이 치솟고 상품들이 제때 입고되지 않아 물가가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경제활동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자 코로나19 봉쇄령으로 그동안 억눌렸던 소비 수요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소비재와 서비스를 중심으로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일손 부족 현상에 임금이 오르면서 물가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인플레이션 장기화를 우려하는 이들은 생각이 다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임대료와 주택가격이 물가 상승을 주도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도 인플레이션이 지속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원유, 천연가스, 석탄 등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에너지 대란이 발생해 불난 물가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원유는 올해 들어서만 64% 급등했고, 천연가스는 최근 6개월 사이 두 배로 올랐다. 석탄 가격은 사상 최고가 기록을 경신 중이다.
인구 대부분이 사는 북반부의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에너지 가격 상승세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류 대란 자체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스웨덴 가구회사 이케아는 최근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제품의 4분의 1 정도가 제조되는 중국에서 물품을 가져오는 것조차 힘든 실정이라며 공급망 혼란이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물가 상승세를 일부 국가만의 일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회원국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8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갔다.
연말 연초만 해도 1%대였던 물가 상승률은 3월 2%대, 4~5월 3%대를 거쳐 현재는 4%대를 기록 중이다.
국제통화금융위원회(IMFC)는 14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인플레이션 위험이 구체화할 경우 각국 중앙은행들은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중앙은행들 기준금리 인상하며 통화정책 정상화 나서
물가가 불안한 중남미 국가를 중심으로 각국 중앙은행들은 이미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지난달 22일 기준금리를 1%포인트 올렸다. 이는 올해 들어서만 5차례 인상이었다.
멕시코 중앙은행도 최근 세 차례 열린 통화정책 회의에서 연이어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콜롬비아 중앙은행도 5년여 만에 처음으로 지난달 30일 기준금리를 올렸다.
칠레는 이달 13일 또 한 번 기준금리를 올리며 인상 횟수를 2회로 늘렸다.
물가가 불안한 러시아의 중앙은행도 올해 들어 5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지난 9월 정기 회의에서 추가 인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구 선진국 중에서 처음으로 노르웨이 중앙은행이 지난달 23일 종전 제로 금리에서 0.25%포인트 올렸다.
아시아 주요국 중에선 한국이 금리 인상 선봉에 섰다. 지난 8월에 기준금리를 올린 데 이어 11월 재차 인상을 예고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5일 한은 국정감사에서 "저희(한은)가 보는 경제 예상에 따르면 11월에 기준금리를 인상해도 큰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중앙은행도 이달 6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며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뉴질랜드 중앙은행의 이번 인상은 2014년 7월 이후 7년여만의 일이었다.
양적완화 정책을 완화한 곳도 이어지고 있다.
호주의 중앙은행은 지난달 7일 회의에서 주간 채권 매입 규모를 기존 50억호주달러에서 40억호주달러로 줄이기로 결정, 테이퍼링(자산매입 규모 축소) 개시를 천명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달 9일 통화정책 회의에서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의 대응 채권 매입 속도를 지난 2개 분기보다 낮추기로 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번 조치가 테이퍼링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ECB가 긴축 정책으로 돌아선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들 들어서 이스라엘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하면서 12월부터 채권 매입을 종결하겠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지난 14일 싱가포르달러 명목실효환율(NEER)의 정책밴드 기울기를 소폭 상향 조정하며 3년 만에 처음으로 통화정책 긴축에 나섰다.
MAS는 기준금리 대신 주요 교역상대국의 환율 변화를 고려한 명목실효환율 정책밴드의 기울기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한다. 기울기를 올린다는 것은 통화정책 긴축을, 기울기를 내린다는 것은 통화정책 완화를 각각 뜻한다.
이제 시장의 관심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11월 선택에 쏠리고 있다.
연준 위원들이 최근 공개된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서 "테이퍼링 결정이 다음 회의(11월 FOMC)에서 내려진다면 그 절차는 11월 중순이나 아니면 12월 중순에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한 만큼 연준도 본격적으로 통화정책 긴축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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