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러-서방 '백신 냉전'…부스터샷위해 유럽 찾는 주러 교민
한국 입국시 격리면제 받기위한 고육책…WHO, 러 백신은 승인안해
러 백신 맞고도 서방 백신 추가접종…'유럽 백신관광' 상품도 출시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러시아 모스크바에 사는 교민 A씨는 지난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부스터샷'(2차 접종 완료 후 추가 접종)을 위해 유럽 국가에 다녀왔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V' 2차 접종을 마친 지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부러 유럽으로 나가 1회 접종용 미국 얀센 백신으로 추가 접종을 받았다.
A씨가 전문가들이 권고하는 부스터샷 적정 시기인 '2차 접종 후 6개월'보다 훨씬 앞서 서방 백신을 추가로 맞은 것은 국내 입국 시 의무 사항인 2주간의 자가격리를 면제받기 위해서였다.
국내 방역 규정상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승인한 백신을 접종받고 2주가 지난 사람은 입국 시 해외 예방접종 완료자로 인정받아 자가격리가 면제된다.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모더나, 얀센, 아스트라제네카(AZ), 코비쉴드(AZ-인도혈청연구소), 시노팜, 시노백 등 7개 백신 접종자만이 격리 면제 대상이다. 미국·독일·영국 등 서방국가와 중국이 개발해 WHO 승인을 받은 백신들이다.
스푸트니크 V를 포함한 러시아 백신은 아직 WHO 승인 백신 목록에 포함되지 않아 접종을 마쳤더라도 해외 예방접종 완료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 당연히 2주간의 자가격리 면제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러시아에서 서방 백신을 맞는 것도 불가능하다. 외국 백신 어느 것도 아직 러시아 당국의 승인을 받거나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급한 용무로 서둘러 한국에 다녀와야 했던 A씨가 아직 부스터샷 시기가 되지도 않았지만 자가격리 면제를 받기 위해 해외로까지 나가 서방 백신으로 추가 접종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제 백신은 '감염 예방용', 서방 백신 부스터샷은 '자가 격리 면제용'이었던 셈이다. 러시아제 백신이 국제 승인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 거주 교민이 택한 고육책이었다.
러시아 백신과 서방 백신을 섞어서 맞는 교차 접종은 아직 제대로 된 임상시험도 이루어지지 않아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더구나 2차 접종 후 6개월이 지나기 전에 맞는 부스터샷은 몸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여러 사정으로 짧은 기간 안에 한국을 다녀와야 하는 모스크바 거주 교민들 가운데는 이미 A씨처럼 유럽 국가에서 추가접종을 받고 왔거나, A씨의 선례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길어야 고작 1주일 정도의 휴가밖에 쓸 수 없는 주재원들의 경우 2주 자가격리 면제 없이 한국을 다녀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자체 개발한 스푸트니크 V 백신에 대한 승인 신청을 지난해 하반기 WHO에 제출했지만, 지금까지 승인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의약품 평가·감독기구인 유럽의약품청(EMA)도 WHO와 보조를 맞추며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승인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WHO는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V 생산 시설 4곳에 대한 실사 결과 국제 기준 위반 사항이 확인돼 이를 시정하고 추가 서류를 제출해야만 승인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러시아는 이미 세계 70개국이 스푸트니크 V를 승인했고, 다수의 국가가 이 백신을 수입해 사용하고 있으며, 임상은 물론 실제 접종 자료를 통해서도 백신이 뛰어난 예방효과와 안전성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WHO의 승인 지연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백신 외교를 방해하려는 서방의 정치적 계산과 국제 백신 시장을 장악하려는 서방 제약사들의 로비와 압박을 이유로 꼽고 있다.
스푸트니크 V는 통상적인 백신 개발 절차와 달리 3단계 임상시험(3상) 전에 1·2상 결과만으로 러시아 정부의 사용 승인을 받으면서, 한때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그러다 지난 2월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랜싯'에 이 백신의 예방 효과가 91.6%에 달한다는 3상 결과가 실리고, 승인 국가들이 크게 늘면서 백신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전반적 분위기 반전에도 서방 보건 당국의 입장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 백신의 국제 승인이 지연되면서 고충을 겪는 것은 러시아인도 마찬가지다.
출장·관광 등의 목적으로 유럽이나 미국을 방문해야 하는 러시아인도 자국산 백신을 맞고서도 입국이 금지되거나 의무 격리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는 11월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완료하고,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외국인들의 입국을 허용할 예정이지만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 V 접종자는 허용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렇게 될 경우 당장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듀크대학 국제보건혁신센터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에 수출된 스푸트니크 V 백신 물량이 4억4천800만 회분에 달해 미국의 여행제한 여파는 비단 러시아 여행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터키, 이집트, 키프로스, 헝가리, 그리스, 모로코 등 일부 국가들은 스푸트니크 V 접종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있으나, 대다수 유럽국가도 러시아 백신 접종자들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입국 후 일정 기간의 자가격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업무상 혹은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자주 해야 하는 러시아인들도 WHO가 승인한 백신을 맞기 위해 접종이 가능한 유럽국가들을 다녀오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심지어 일부 러시아 여행사들은 이러한 자국민 수요를 고려해 '유럽 백신 관광' 상품까지 내놓았다. 한 여행사는 4일간의 일정으로 동유럽의 세르비아로 가 얀센·화이자 등의 서방 백신을 맞고 돌아오는 상품을 500달러(약 60만 원)에 홍보하고 있다고 BBC 방송 러시아어판이 소개했다.
반대로 서방 백신을 맞은 외국 여행객들은 러시아에서 미접종자 취급을 감수해야 한다.
러시아와 서방 간의 팽팽한 '백신 냉전' 속에 양 진영의 불신과 대립이 바이러스에 이은 또 다른 고충을 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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