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中전력대란에 어른거리는 계획경제 그림자
당 최우선 요구 과제 달성 위해 지방 '밀린 숙제'…무리한 '전기 끊기'
사회주의 체제 강력한 집행력 장점과 체제 경직성 약점은 '동전의 양면'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지난 23일 밤, 중국 선양(瀋陽)시 신베이(新北)구 도로에서는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돌발 정전으로 도로를 비추던 가로등은 물론 신호등까지 꺼지면서 많은 차가 얽혀 극심한 교통 체증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전은 불편에 그치지 않고 주민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24일 랴오닝성의 한 공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환풍기가 멈춰 용광로에서 나온 유독 가스가 밖으로 나가지 못해 노동자 23명이 중독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최근 중국 동북3성 지역에서 잇따른 대규모 정전은 중국의 전력난이 산업용 전력 공급 제한 수준을 넘어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블랙아웃(blackout·대정전)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 지방정부들, 3분기 '탄소 배출 점검' 앞두고 실적 맞추기
세계 금융시장을 바짝 긴장시킨 헝다(恒大) 사태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중국의 이번 전력 대란 뒤에는 중국 특유의 계획경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9월 중순 이후 돌출한 중국 전력 대란의 원인으로는 '호주와의 외교 전쟁'으로 인한 석탄 수입 부족 등이 거론되지만 '에너지 소비 이중 통제'(能耗雙控)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탄소 배출 저감 정책이 핵심 원인이 된 것에는 틀림이 없다.
'에너지 소비 이중 통제'란 중앙정부가 연초 세운 계획에 따라 각 지방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에너지 소비량, 총 에너지 소비량을 양대 기준을 일정 수준 이내로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중앙정부인 국무원은 올해 GDP 대비 에너지 소비량을 작년보다 3% 줄이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 실적 점검 결과, 많은 성(省)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작년보다 에너지 소비가 도리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각 지방 지도자들은 연내 에너지 소비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됐다.
경제 계획을 총괄하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지난 8월 펴낸 상반기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광둥, 장쑤, 칭하이, 푸젠, 윈난, 닝샤자치구, 광시자치구 등 7개 성급 지역이 '이중 통제'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해 '이중 적색경보'를 받았다.
중국의 각 지방 책임자들은 매해 당 중앙과 정부로부터 경제 발전, 금융 안정, 방역 관리, 주택 가격 안정, 사회 불안 통제, 재난재해 대처 등 다양한 목표를 하달받는데 이중 경제 발전과 방역 관리처럼 일부는 서로 상충한다.
지방 관리들은 문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눈치를 살피며 그때그때 중앙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과제 위주로 정책을 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작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자국의 탄소 배출량이 2030년까지 정점을 찍고 내려가 2060년에는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것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올해부터 저탄소가 최우선 정책 과제로 부상했다.
8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보고서 발간 이후 각 지방은 당장 3분기 실적 점검을 앞두고 '밀린 저탄소 숙제'를 하느라 난리가 났다.
장쑤성, 광둥성 등 중국의 31개 성·직할시 중 16곳이 '에너지 소비 이중 통제' 목표 달성을 위해 9월 중순부터 각 지역에서 공장에 전기 공급을 줄이거나 아예 끊는 '전기 배급'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은 오늘날 중국의 전력 대란이다.
동북 대정전 사태가 중국에서 전국적 핫 이슈로 부상하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자 중국은 민생을 위해 전기를 철저히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국가전령망공사는 27일 긴급 성명을 내고 "시진핑 총서기의 에너지 안보에 관한 중요 지시 정신에 따라 전력으로 전기 공급 전에 나서 기본 민생용 전력 수요를 보장하면서 최대한 전력 공급 제한 상황을 피하겠다"고 밝혔다.
전력 대란의 출발은 시 주석이 주창한 탄소 배출 저감 정책이었는데 대정전 사태의 해결도 최고 지도자인 시 주석의 '은혜'로 선전되는 것이다.
◇ 방향 정하면 강력히 추진하지만 경직성 탓 시동·수정 쉽지 않아
하반기 중국 경제를 덮친 '복병'이 된 전력 대란은 개혁개방 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한다지만 여전히 계획경제 요소가 강한 중국 체제의 경직성을 다시 한번 부각했다.
이번 전력 대란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탄소 배출 저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국이 민심 동요에 다급히 전력 공급 보장을 약속한 것을 보면 중앙 정부가 당초 이번과 같은 혼란스러운 사태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계획경제의 경직성이 가장 큰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 것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집권기 추진된 대약진 운동 때다.
당시 중국 전역이 중앙이 하달한 '철강 생산량'이라는 목표 달성에 골몰한 나머지 멀쩡한 기계와 농기구를 용광로에 넣고 쓸모가 없는 저질 철을 생산했다.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수천만명이 아사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전력 대란 속에서 중국 내부에서도 무리하고 거친 정책 집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경제관찰보는 "에너지 소비 이중 통제는 한 판의 장기전이어서 '운동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며 "각 지방이 기업과 협력과 소통을 강화해 정상적인 생산 경영 질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많은 중국인은 여기서 언급한 '운동'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발생 후 중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보다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코로나19의 확산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막고 경제를 빠르게 정상화했다.
특히 작년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 선진국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심각한 경제·사회 위기를 맞으면서 중국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를 압도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갖는 자국의 정치 체제가 서방의 민주주의 체제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우월감'까지 폭넓게 자리 잡았다.
중국의 주장대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는 일단 중앙이 방향을 설정하면 장기간 내부 반대 없이 이를 매우 강력하게 집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전력 대란 사태가 보여줬듯이 작은 문제가 커져 사태로 비화할 때까지 누구도 용감하게 나서 노선 수정을 건의하기 어려운 사회주의 체제의 경직성이라는 약점은 어쩌면 중국 체제가 가진 강력한 장점과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이제 와 '위대한 승리'로 묘사하지만 세계적 대재난으로 이어진 코로나19 유행 초기, 은폐·축소를 기도했다는 비난이 제기될 정도로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던 당국의 대처 역시 체제 경직성과 관련이 깊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7월 허난성 폭우 때 지하철에 물이 가득 찼는데도 운행을 중단하지 않아 수십명이 숨진 참사가 난 것도 상부의 지시가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는 중국 관료사회의 복지부동 문화가 낳은 인재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지난 6월 중국 중앙문헌출판사가 펴낸 '당의 엄격한 통치에 관한 시진핑의 발췌된 발언'에는 시 주석이 지난 1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19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회의에서 관리들의 무사안일 태도를 질타하며 한 이런 발언이 실렸다.
"일부 관리는 지도부가 작성한 서면 지시를 받아야만 움직이고 그런 지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지시를 배포하지 않으면 이들은 아무 일도 안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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