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도쿄올림픽이 불지핀 이탈리아 '혈통주의' 논쟁

입력 2021-08-13 07:07
[특파원 시선] 도쿄올림픽이 불지핀 이탈리아 '혈통주의' 논쟁

다양성이 추동한 선전 계기로 가혹한 국적법 개정 도마에

伊서 태어나 자란 이주민 자녀 국적 취득 완화 여부 관건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인종적 다양성을 무기로 도쿄 올림픽에서 역대 가장 많은 40개 메달을 휩쓸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이탈리아에서 국적법 논쟁이 재점화했다.

불을 지핀 이는 조반니 말라고 이탈리아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다.

도쿄 현지에서 가진 대회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스포츠 부분에 '속지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치권에 불만을 토로한 게 발단이었다.

발언 배경은 이렇다.

이탈리아의 국적법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속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자국에 실제 거주하는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법을 적용하는 속지주의와 달리 속인주의는 민족·인종 등 인적 요소에 중점을 둔다. 혈통을 강조하는 셈이다.

이러한 법률상 원칙에 따라 이탈리아는 출생지와 관계없이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이탈리아 국적을 갖고 있다면 그 후손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준다.



이번 도쿄 올림픽 남자 육상 100m와 400m 계주에서 모국 이탈리아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마르셀 제이컵스가 대표적이다.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인 그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으나 국적법에 따라 자동으로 이탈리아 국적까지 갖게 됐다.

이탈리아 삼색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가운데 제이컵스와 같은 해외 태생은 46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 부모의 자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탈리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가 외국 국적이면 18세가 되어야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다.

지독한 관료주의 탓에 시민권 취득 절차에 최장 4년여가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20대 초반에야 정식으로 이탈리아 시민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똑같이 정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이지만, 생후 20년간은 법적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닌 다소 모순된 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적법은 스포츠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실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탈리아 시민권이 없으면 대표팀에 발탁될 수 없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국적법은 같은 속인주의를 채택한 유럽에서도 매우 엄격하고 가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일랜드나 포르투갈은 외국인 부부가 자녀를 낳은 뒤 최소 3년 이상 거주하면 시민권 신청 자격을 준다. 독일의 경우 자녀 출생 후 10년의 거주 기간을 요구한다.

말라고 위원장의 발언은 스포츠 분야만이라도 속지주의를 가미한 유연한 국적법을 적용해 달라는 일종의 하소연이었다.

이탈리아 태생의 탁월한 이민자 후손의 국적을 인정해주고 일찍부터 대표팀에서 뛸 기회를 준다면 국제대회에서 더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취지다.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서는 나이지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여자 장대높이뛰기 선수 그레이트 은나치(17)가 사례로 거론된다.

북부 토리노 태생의 그는 국내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고 이탈리아 최고 기록까지 보유하는 등 일찌감치 최대 대표 유망주로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시민권이 없어 도쿄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은나치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실질적으로 이탈리아인이고 국내 챔피언이지만 해외에서 조국을 위해 뛸 수 없다"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불만을 표했다.

제이컵스와 함께 4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나이지리아 이민자 가정 태생의 에세오사 데살루는 오랜 기다림 끝에 빛을 본 케이스다.

20년의 이방인 삶을 견디고서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 대표팀에 발탁돼 결국 올림픽 금메달까지 손에 쥐었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은나치처럼 이탈리아인으로 살아왔지만, 법적으론 외국인인 10대 청소년이 100만명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사회 일원으로 포용하는 일은 여전히 국가적인 숙제다.

말라고 위원장의 호소는 이탈리아 정치권에 국적법 개정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촉매제가 된 모양새다.



당장 국적법 주무부처인 내무부의 루치아나 라모르게세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는 국적법 개정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고, 민주당(PD)을 비롯한 좌파 성향의 정당들도 이를 환영하고 나섰다.

관건은 이민·난민 반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극우 정치인들의 반발을 극복하는 일이다.

사실 이탈리아에서의 국적법 개정 문제는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해묵은 주제다.

총선으로 새 의회가 들어설 때마다 국적법 개정안이 발의되고 이렇다 할 논의 없이 사장(死藏)되는 일이 반복됐다. 우파 정당들의 반대가 주된 원인이다.

현재도 이탈리아 의회에는 3건의 국적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라고 한다. 법안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자국 태생 이주민 자녀의 국적 취득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데살루의 영광을 재현할지, 은나치의 불운을 대물림할지 이제 이탈리아 정치인들이 진정 답을 해야 할 차례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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