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고위급, 4개월여만에 또 대면 충돌…접점 모색보단 강대강
셰펑 "중국을 가상의 적 삼아"…레드라인 거론하며 요구사항·관심목록 첫 제시
셔먼 "중, 국제질서 훼손 우려"…인권·코로나 기원·남중국해 고리로 공세
3월 알래스카 담판 '데자뷔?'…미중 정상회담·대북협력 협의에 관심
(워싱턴·베이징=연합뉴스) 류지복 김윤구 특파원 = 으르렁대던 미국과 중국이 26일(현지시간) 또다시 충돌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이 중국 톈진(天津)에서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 겸 외교담당 국무위원, 대미 업무 담당 차관급인 셰펑(謝鋒) 부부장을 만났지만 협력 모색보다는 갈등의 확인에 방점이 찍혔다.
셔먼 부장관은 지난 1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후 6개월 여만에 중국을 방문한 최고위 인사여서 큰 관심을 모았지만 그동안 쌓인 감정의 골과 반목을 줄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양국 외교부에서 전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공세가 거세 보였다. 셔먼 부장관을 안방까지 불러놓고 불만을 쏟아낸 셈이다.
지난 3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한일 순방 직후 중국을 방문하지도 않은 채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을 미국 영토인 알래스카로 불러들인 뒤 1시간 넘게 언론 앞에서 서로 거세게 충돌한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이날 미국에 요구하는 개선사항과 자신들의 중점 관심사안을 담은 두 가지 리스트를 처음으로 제시할 정도로 공세를 펼쳤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셰 부부장은 "중미 관계는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일부 인사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악마화해 미국의 구조적 문제를 중국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미국의 '경쟁, 협력, 대항'이라는 삼분법은 중국을 봉쇄하고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한 뒤 "미국은 매우 잘못된 사고와 위험한 대중국 정책을 바꿔야 한다"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점을 찾는 것)'라는 성어를 사용해 미국의 태도변화를 촉구했다.
중국이 이날 제시한 개선요구사항 목록에는 미국이 관리 등에 대해 취한 비자 제한 철폐, 제재 해제 등이 담겼고, 중점 관심사안에는 미국 내 중국 국민에 대한 '부당한 대우', 반중 감정의 부상, 중국인에 대한 폭력 등에 대한 조속한 해결 등이 포함됐다.
그는 "미국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고 중국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을 중단하라"면서 "레드라인을 침범하고 불장난으로 도발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이에 셔먼 부장관은 "양국 간 치열한 경쟁을 환영한다", "중국과 갈등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미국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전달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국무부에 따르면 셔먼 부장관은 왕이 부장 등 중국 관리들을 만나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훼손하는 중국의 일련의 조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국무부 자료엔 셔먼 부장관이 만난 인사의 이름으로 왕 부장만 나오고 셰 부부장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특히 셔먼 부장관은 홍콩 민주주의 탄압, 신장의 대량학살과 반인륜 범죄, 언론 자유 축소 등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권 우려를 제기했다.
또 사이버공간, 대만해협,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행위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달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기원에 대한 2단계 조사를 허용하지 않는 등 중국이 세계보건기구(WHO와 협력을 거부한 데 대해서도 거듭 우려를 표명했다.
이번 회담은 오는 10월 이탈리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성사 가능성이 제기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 정상회담에 앞서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모색하는 징검다리 성격이 있다는 예상이 있었다.
양측 간 갈등과 충돌이 부각되는 바람에 실제로 어떤 대화와 교감이 이뤄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서 중국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북문제를 협력 가능한 분야로 언급해 왔다는 점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도 관심사다.
국무부는 셔먼 부장관이 이란, 아프가니스탄, 미얀마와 함께 북한 문제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전했고, 셰 부부장도 "미국이 기후변화, 이란 핵 문제, 한반도 핵 문제 등에서 중국의 협력과 지지를 요청했다"고만 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에 레드라인과 개선요구를 담은 리스트를 전달했다"며 "이는 전례 없는 행보로, 중국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들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중간 몇 달만의 첫 고위급 회담에서 심대한 차이점이 부각됐다"며 "두 나라가 점점 더 경색되는 관계를 개선할 분명한 길을 찾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번 방중이 구체적 이슈 협상보다는 경쟁이 충돌로 변하지 않도록 가드레일을 설정하고 고위급 소통 채널을 열어두는 데 초점이 있었다면서도 대화가 때때로 매우 힘들었다(tough)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중 양국의 대면 고위급 대화는 지난 3월 미국 알래스카에서 블링컨 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양제츠 정치국원과 왕이 부장이 2+2 고위급 회담을 가진 이후 4개월여 만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회담에서도 미국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롯해 각종 현안에 돌직구를 던지고 중국은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격하게 받아치는 등 험악한 모습을 연출했다.
셔먼 부장관의 방중 역시 알래스카 담판의 데자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갈등이 계속 증폭하는 양국 관계의 현실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셔먼 부장관은 이번 한일 순방길에 중국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지난 15일 국무부 자료에 이 일정이 빠졌다가 추후 방중 사실을 발표하는 등 신경전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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