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톡톡] 서양인 눈에 비친 연해주 고려인의 삶

입력 2021-06-26 08:08
[사진톡톡] 서양인 눈에 비친 연해주 고려인의 삶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사진은 기록입니다.

순간의 모습을 거짓 없이 담아내, 그 자체가 역사로 평가받습니다.

옛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인 셈입니다.

여기 낡고 빛바랜 흑백의 사진들이 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했던 미국인 여성 엘리너 프레이(1868~1954)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꾀죄죄한 모습의 아이 3명이 골프를 즐기는 서양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아이 2명은 하얀 천을 어깨에 메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골프채가 담겨있습니다.

발렌틴 박(71) 연해주 고려인연합회 회장은 자신의 저서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거주지 8권'에서 이 사진에 대해 '볼을 모으는 것을 돕는 한인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인들이 쥐여준 품삯으로 사진 속 아이들이 무엇을 했을지가 매우 궁금해집니다.

연해주에는 한인들과 관련된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일부는 이미 역사 서적 등을 통해 대중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접하기 어려운 만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국립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기자가 확보한 사진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합니다.



위 사진은 '카레이스카야' 거리의 1920년대 모습입니다.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과 그 아래 저지대는 최초 이주한인들의 집단거주지입니다.

1874년 한인들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해 이곳은 개척리(開拓里)라고도 불렸습니다.

이곳에는 항일독립 운동단체와 한인 학교, 한인 언론기관 등이 있었습니다.

한인들의 손때가 묻은 이 거리의 현재 명칭은 포그라니치나야 거리입니다.



1863년을 기점으로 연해주에 서서히 뿌리를 내린 한인들은 '동토'에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성실성으로 자신들의 삶을 일궈냈습니다.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한인사회는 성장을 거듭했고, 인구는 많이 늘어났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는 형태의 사진들은 당시 성장하던 한인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전까지 한인 커뮤니티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초기에 정착했던 한인 일부는 상업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죠.

대표적인 인물이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최재형(1860∼1920) 선생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인은 주로 농업과 수산업에 종사했습니다.

당시 한인 사회의 농촌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이 연합뉴스에 제공한 사진 가운데는 유독 엘리너 프레이가 촬영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6년간 거주했습니다.



그는 사업가인 남편을 따라 1894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습니다.

현지에서 그는 인물과 풍경 등을 사진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촬영한 사진은 1천 장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사진만 촬영한 것이 아닙니다.

거의 매일 미국과 중국, 유럽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며 그가 느꼈던 감정 등이 편지 내용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엘리너 프레이가 작성한 편지만 2천 통 이상입니다.



그는 편지로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생활 환경이나 사건 등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엘리너 프레이를 러시아 극동 최초의 블로거로 평가합니다.

1만6천 장의 편지는 그가 죽고 난 뒤인 2008년 후손들에 의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당시 국제정세와 맞물려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습니다.

85세의 나이로 1954년 미국에서 숨진 그를 기리기 위해 2014년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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