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스가 일본 총리의 '동문서답식 소통'

입력 2021-06-12 07:07
[특파원 시선] 스가 일본 총리의 '동문서답식 소통'

당수토론서 코로나·올림픽 질문에 '딴소리' 반복

말이 안통하는 정치에 유권자는 서서히 등 돌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정치판에는 기자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장면이 꽤 있다.

그중 하나는 정치인의 비리에 대해 '설명 책임'(說明責任)이라는 표현을 들먹이는 것이다.

여당 주요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금품을 제공해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국민이 수긍할만한 설명을 할 의무가 있다'며 설명 책임을 똑바로 이행하라고 관계자에게 촉구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당사자가 해명할 시점은 이미 지난 셈이다.

문제를 일으켜 놓고도 인정하지 않아 사법부가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비위를 일으킨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법적 책임을 지는 일인 것 같은데 일본 정치인들은 시종 설명 책임 타령을 한다.

정작 설명이 필요한 시점에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곤 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다.

일본 유권자들이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것은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어떻게 할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등일 것이다.

작년 9월 취임한 스가 총리는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는 등의 모호한 답변을 반복하거나 질문과 상관없는 답변용 원고를 읽어내리기 일쑤였다.



9일 일본 국회에서 열린 당수토론(黨首討論)이 관심을 끌었으나 스가는 동문서답을 반복했다.

당수토론은 영국 하원 본회의에서 실시하는 당수 정례 토론인 '퀘스천 타임'(question time)을 모델로 도입됐다.

야당 대표와 총리의 일대일 문답이라서 유권자들은 평소보다 심도 있는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며 총리나 야당 대표는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일본 국회는 당수토론이 아니라도 회기 중 여러 상임위를 열어 총리를 상대로 질문을 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총리뿐만 아니라 다른 각료가 대신 답변하기도 하므로 당수토론과는 일반적으로 문답의 밀도에 차이가 있다.

스가 총리는 취임 후 처음 열린 당수 토론에서 논점을 벗어난 이야기로 시간을 때웠다.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입헌민주당 대표가 코로나19 재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도쿄의 하루 신규 확진자가 50명 정도로 축소할 때까지 긴급사태를 유지해야 할 것 같다는 견해를 표명하고서 긴급사태 해제 기준을 묻자 스가 총리는 백신 접종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스가는 "백신 접종이야말로 결정적 카드라고 생각한다. 현재 전국 지자체나 의료 종사자의 대단한 노력으로 백신 접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올해 10월에서 11월에 걸쳐서 필요한 국민, 희망하는 모든 분이 (접종을) 끝내는 것을 실현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늘어놓았다.

에다노 대표가 '국민의 목숨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대회의 전제'라는 스가 총리의 앞선 발언을 거론하며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참가자에 의한 감염 확산 외에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 감염이 확산하는 것도 막겠다는 의미냐고 질문했을 때는 6분 넘게 이와 무관한 답변을 이어갔다.



스가는 외국에서 오는 선수나 관계자에 의한 감염 확산 방지 대책, 자신이 고교생이던 1964년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지켜본 소감, 올해 올림픽을 통해 국제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 등을 길게 설명했다.

그는 답변 말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도쿄도(東京都), (일본) 정부 사이에서 국내 기준에 맞는 모양새로 방향성을 6월 중에 결정"한다고 '감염'에 관해 언급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자국민의 이동이나 접촉이 증가해 감염이 확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는데 이에 관해 스가 총리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지는 불분명했다.



스가는 관방장관 시절 정례 기자회견 때 알맹이 없는 답변을 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총리가 된 후에는 부실 답변이 더 심각해진 양상이다.

지난달 28일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단 간사 자격으로 질문에 나선 주니치(中日)신문 기자가 "정면에서 답변하지 않거나 애매한 것이 많아서 보고 있는 국민이 불만을 느끼거나 한다. 제발 명확하게 답변해줄 것을 부탁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는 해명을 요구하고, 설명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정치에 일본 유권자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이달 4∼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스가 내각에 대한 반대 여론은 50%로 지지 여론(37%)보다 13% 포인트나 높았다.

스가 내각을 지지한다고 밝힌 응답자의 54%는 '다른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지 이유로 꼽았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들의 42%는 스가 총리에게 지도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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