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사상 최대 '이건희 상속세'·사회 환원 발표한 삼성가
(서울=연합뉴스) 지난해 10월 타계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상속인들이 28일 사상 최대 규모의 상속세 납부와 유산의 사회 환원 계획을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등 상속인들이 납부할 상속세는 12조원 이상으로 역대 최대이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정도의 규모다. 이와는 별도로 이 회장이 남긴 재산 가운데 1조원을 출연해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 등 감염병 퇴치와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08년 특검 수사로 드러난 비자금을 실명 전환하면서 벌금과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돈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밝혔는데 그의 사후에 이 약속이 실천된 것이다. 이와 함께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개인 소장 미술품 가운데 절반이 넘는 2만여점을 각각의 성격에 맞게 국립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공립 미술관에 분산 기증한다. 겸재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와 이중섭, 모네, 달리 등 국내외 대가들의 작품이 포함돼 있어 감정가만 3조원에 이르고 시가는 추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이로써 계열사 지분을 중심으로 약 26조원에 이르는 이 회장의 유산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국가에 환원되는 셈이다.
살아서 한국 경제의 거목이었던 이 회장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유족들이 내는 상속세만 해도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상속세 세수의 3~4배, 지난 2011년 사망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유족들이 낸 상속세의 3.5배에 이르는 규모라고 한다. 후손들이 유지를 계승한 사업을 이어오며 사후 100년이 지나서도 이름이 기억되는 미국 록펠러나 카네기의 경우와는 달리 이 회장 유산의 사회환원은 '일회성'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회장 일가는 거액의 출연금과 소중한 미술품들을 내놓았으면서도 막상 이의 운용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1조원의 출연금은 국립중앙의료원과 서울대어린이병원 등에 넘겨져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협의해 사용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미술품들도 여러 국공립 기관에 이전된 뒤에는 삼성이나 이 회장 일가가 관여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유족들은 "생전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노력'을 거듭 강조한 이 회장의 뜻에 따라 다양한 사회환원 사업을 지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으니 이 회장 일가가 '한국의 록펠러', '한국의 카네기' 가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아무리 큰 부자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막대한 세금 이외에도 뜻깊은 일에 쓰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재를 국가와 사회에 내놓은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환호와 칭송의 박수만을 보내기에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삼성이 처한 지금의 상황, 특히 고인의 외아들이자 계승자인 이 부회장이 경영권 불법 승계와 국정농단 사건 등에 연루돼 수감 중인 현실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거액의 기부를 알리는 것이 이 부회장의 사면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으니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다.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이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각계의 호소가 빗발쳤다. 나름의 근거가 있는 주장들이고 여기에 다른 의도가 개입돼 있다고 보지 않지만, 사면은 법적 요건을 갖춰야 하고 국민적 공감도 전제돼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의 사면을 간절히 원하는 측에서도 자칫 이 회장 일가의 선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지켜보는 것이 옳은 태도일 듯하다.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큰 만큼 이 회장 유산의 상속과 관련해 '집안 문제' 이상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유족들은 12조원이 넘는 상속세를 오는 2026년까지 분할해 납부할 계획이지만, 한국 제일의 재벌가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부회장 등 유족들이 지분을 가진 계열사에서 받는 배당금이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금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들의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일부 계열사가 삼성의 품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가족 간 유산 배분 과정에서 그룹과 계열사의 지분 구조가 바뀔 가능성도 제기된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커다란 어려움에 맞닥뜨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법규와 상식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일부 재벌그룹에서 보였던 가족 간 아귀다툼이나 '절세' 또는 재원 마련을 위한 편법 동원으로 문제가 된다면 이 회장 일가는 물론 한국 경제 전체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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