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우려 있다'…영국 법원, 어산지 미국 송환 요청 불허(종합)

입력 2021-01-04 22:43
'자살 우려 있다'…영국 법원, 어산지 미국 송환 요청 불허(종합)

"우울증 등 증세 보여"…'언론의 자유'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아

미국 정부는 항소 전망…대법원에서 최종 판가름날 듯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영국 법원이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49)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범죄인 송환 요청을 불허했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BBC 방송에 따르면 런던 중앙형사법원은 이날 어산지의 미국 송환 여부와 관련해 이같은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어산지 송환 요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등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는 어산지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어산지가 미국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어산지의 행동이 언론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는 변호인측 주장에는 어산지가 탐사 저널리즘를 넘어서는 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승인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구체적으로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허용하면 그가 자살을 시도할 실질적인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어산지가 때때로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정신발달 장애인) 아스퍼거 증후군과 자폐증 등의 증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2019년 5월 그의 감방에서 면도날이 발견됐으며, 어산지가 의료진에게 자살에 관한 생각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미국에서 어산지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면서 "정신적 손상에 관한 이유로 송환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어산지의 석방을 명령했다.



짙은 남색 양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어산지는 재판 진행 중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어산지의 연인 스텔라 모리스, 위키리크스 편집장인 크리스틴 흐라픈슨 등이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어산지 지지자들은 법정 밖에서 "어산지를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미국 정부는 이날 판결에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정식 항소는 14일 이내 제기돼야 한다.

이에 따라 어산지는 계속 수감될 예정이지만 변호인 측은 이날 보석 신청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미국은 2019년 어산지를 방첩법(Espionage Act) 위반 혐의 등 18개의 혐의로 기소하고, 영국 측에 어산지의 송환을 요청했으며, 영국 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이후 미국 정부와 어산지는 송환 여부를 둘러싸고 영국 법원에서 법정 다툼을 이어왔다.

호주 출신의 어산지는 미군의 브래들리 매닝 일병이 2010년 빼낸 70만건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보고서, 국무부 외교 기밀문서를 건네받아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통해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어산지는 미국의 1급 수배 대상이 됐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인사 등 주요국 지도자에 대한 미국 정부의 비판과 평가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산지는 또 지난 2010년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아파치 헬기로 로이터 통신 기자 2명을 포함한 십수 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2007년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후 어산지는 영국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에서 7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가 2019년 4월 영국 경찰에 체포된 뒤 보석조건 위반 혐의로 징역 50주를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런던에서 진행된 재판은 방첩법 위반 혐의 등 미국 정부가 기소한 어산지의 혐의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어산지 송환 요청이 적절한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앞서 미국과 영국은 2003년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었다.



이날 법원이 어산지 송환을 불허했지만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쳐 확정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을 중심으로 이날 법원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집권 보수당의 데이비드 데이비스 하원의원은 "어산지 송환이 가로막혔다는 것은 좋은 뉴스"라며 "정치적 기소를 위해 범죄인 인도 조약이 이용돼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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