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왕실모독죄·물대포 무섭지만…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
태국 반정부 시위대 국왕 최대주주 은행서 '국민 재산 돌려달라'
"젊은이들 군주제 개혁 한 마음 의의"…방독면·고글 등 부쩍 늘어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국민은 국민 재산을 국왕에게서 되찾아오기를 원한다'
태국 방콕 북부 시암상업은행(SCB) 본사 앞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반정부 집회장에 펼쳐진 대형 현수막에 쓰인 문구다.
기자는 이날 오후 3시 반정부 시위를 앞두고 20여 분 전 현장을 찾았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SCB측은 바리케이드로 주변을 막고, 경찰을 동원해 출입을 막고 있었다.
건물 앞 정중앙에는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커다란 초상화가 설치돼 있다. 오른쪽 건물 외벽 통유리에도 가마를 타고 행진하는 국왕의 모습이 붙어 있다.
태국 국왕이 최대 주주(지분 약 23%)인 대형 은행임을 짐작게 하는 모습이다. 국왕 재산은 약 400억 달러(약 45조8천억원)로 추산된다.
원래는 왕실자산국이 왕실 자산을 관리해왔지만, 군부 정권 시절인 지난 2017년 왕실의 모든 자산을 국왕이 직접 관할하고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왕실자산 구조법이 제정됐다.
금기를 깨고 군주제 개혁을 요구 중인 시위대는 이런 이유로 시내 중심 왕실자산국에 집결할 예정이었지만, 왕실 지지파와의 충돌을 우려해 SCB 본사 앞으로 전날 밤 긴급하게 장소를 변경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노란색이 멀리서 눈에 띄었다. 왕실 지지자들이 입는 옷 색깔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가 보니, 최근 반정부 시위대의 상징으로 떠오른 노란색 오리 고무보트였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상황을 풍자하는 도구인 동시에 물대포를 막는 '방패'로 사용되고 있다.
군주제 개혁을 외치는 시위대가 내놓은 상징물의 색깔이 현 국왕을 상징하는 노란색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노란색 오리 복장을 한 반정부 인사 파릿 치와락이 취재진에 둘러싸였다.
전날 경찰이 그를 포함해 시위 지도부 12명에 대해 왕실모독죄를 적용해 소환장을 발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모독죄라는 건 아주 오래전 법이자 야만적인 법"이라며 "이 법이 사용될 때마다, 군주제와 태국에 해를 끼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죄목으로 소환장이 발부된 탐마삿대 학생 파누사야 싯티찌라와따나꾼도 한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자원봉사 경호단이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쌌다.
파누사야는 지난 9월 집회에서 '군주제 개혁 10개항'을 공개적으로 발표해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전날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시위대 중 일부가 112라는 숫자 위에 빨간 선이 그어진 팻말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112는 형법 112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왕실모독죄를 말한다.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왕세자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왕가에 대한 부정적 묘사 등을 하는 경우 최고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궁금했다. 잘못하면 15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왕실모독죄를 적용한다고 경찰이 엄포를 놓는데 시위대는 어떤 반응일까.
별명을 위우(15)와 깐(15)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교복은 입지 않았다.
군주제 개혁에 찬성하는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깐은 "국왕은 태국이 아닌 독일에 자주 가 있어서 태국민을 도와주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왕실모독죄 적용에 대해서는 "너무 심하다"(깐), "왕실모독죄는 물론 다른 법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위우)는 답이 돌아왔다.
노란 오리 모양 장식을 머리에 하고 앉아 있던 노년의 여성을 만났다.
매랙(62)씨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이며, 이날 집회에 자신과 같은 레드셔츠들도 많이 왔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데 오늘은 걱정돼서 와봤다"는 매랙씨는 총리 퇴진 및 군주제 개혁 요구에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무서워서 얘기하지 못했다"면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찬성하고 존경한다"고 말했다.
군주제 개혁에 찬성하는 이유에 대해 매랙씨는 "태국은 입헌군주국인 만큼, 국왕은 헌법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군주제 개혁이 성공할 거 같으냐고 묻자 "이번에 당장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도 "전에는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반정부 시위를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왕실모독죄가 무섭지는 않다면서도, 젊은이들이 다칠까 봐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시위대의 중심 연령층인 20대를 만나봤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벨(24)씨는 기자에게 경제나 정치 문제가 모두 군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군주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정치나 경제가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태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대학생 남(21)씨는 "세계는 급속히 변하는 만큼, 왕실도 그 흐름을 따라 개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벨씨는 군주제 개혁 요구가 이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고 했다.
의아한 기자가 이유를 물으니 "구체적인 결과는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가 군주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의의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물대포나 왕실모독죄 적용이 무섭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무섭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벨)이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이날 집회는 지난 17일과는 달리 경찰의 물대포나 최루탄도 없었고, 차벽도 철조망도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혹시 물대포에 노트북이 물에 젖을까 비닐에 싸 오고, 헬멧을 준비한 것이 '오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집회가 마무리된 뒤 현장 인근에서 누군가가 총기를 발사해 2명이 다쳤다는 소식이 현지 언론을 통해 들려왔다.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시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집회장 양쪽에서 시위대측 자원봉사 경호단이 출입자들 가방까지 열어 소지품을 조사하고, 인근 노점에서 판매하는 물품 중 헬멧이나 고글 그리고 방독면 등이 부쩍 늘어난 모습이 떠올랐다.
시위대는 군주제 개혁에 공감하고 성공을 거뒀다는 자평도 하지만, 여전히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이슈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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