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보다 무서운건 선입견"…런던 남북한 동포 속마음 들어보니
영국 내 한국인 4만명·탈북민 800명…10년 전부터 뉴몰든서 공생
온라인 토론회서 함께 살면서 좋았던 점·서운한 점 등 솔직히 털어놔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현재 영국 런던 한인 커뮤니티가 있는 뉴몰든에 거주하는 고선영(38)씨는 열네 살 때 북한의 고향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고씨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향할 때 기대에 부풀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처럼 대학을 다니고 좋은 직장을 갖는 꿈을 가졌다.
현실은 달랐다. 탈북 후 중국에서 보낸 시간으로 인해 이미 한국의 또래에 비해 3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고민은 계속됐다.
"내가 과연 이 친구들과 경쟁해 회사에 취직하고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미국이나 영국이란 나라 자체를 그때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겉도는 느낌이 너무 불편했다. 자신이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한 시선도 참기 힘들었다.
결국 영국으로 건너온 지 9년. 고씨는 한인 동포들이 주로 사는 뉴몰든에 자리를 잡았다. 주로 탈북민들의 자녀를 교육하는 한겨레 탈북민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영국에는 4만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데, 탈북 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영국에서 사는 북한 동포 800여명도 주로 뉴몰든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30년 전 이민을 와 형성한 한인사회에 10년 전부터 탈북민들이 합류하면서 뉴몰든은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또 따로 있는 모습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고씨는 그러나 이곳에서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처음에는 반갑게 인사하던 자녀 학교의 다른 한국인 학부모들은 그녀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거리를 뒀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뒤 학부모들이 커피를 마시러 갈 때도 고씨만 따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씨는 "이민 역사가 오래된 한국인은 이곳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다"면서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는 같이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지만, 탈북민 출신 엄마들은 주로 식당이나 마트에서 일하다 보니 어울리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탈북민 출신 인권활동가인 박지현(51)씨는 2008년 난민으로 영국에 정착했다.
국제엠네스티 영국지부가 인권 증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올해 신설한 '엠네스티 브레이브 어워즈' 수상자이기도 하다.
북한 청진 출신인 박 씨는 1990년대 후반 북한 식량난 때 아사 직전의 아버지 권유로 탈북했지만 이후 중국 등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은 뒤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녀는 북한을 떠난 뒤로 늘 '정'이 그리웠다고 한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감시와 통제, 어려움 속에 살았다. 그래도 명절에는 부족하지만 음식을 나눠 먹고 아프면 위로해주는 정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을 떠난 뒤로는 그런 정을 느끼지 못해 외롭고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맨체스터에서 처음 한국인 식당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 그녀는 그렇게 그리던 정을 다시 느끼게 됐다.
한국 출신인 사장은 일이 끝나면 박씨의 자녀를 위해 간식 등을 따로 챙겨줬다. 다른 기회로 알게 된 한국인들은 자신의 자녀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고 선물을 줬다.
일가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해외지만 "살 수 있겠구나"라는 행복감이 들었다.
박씨는 "북한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도 정이라는 것이 있구나. 우리는 한민족이구나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때 처음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고씨와 박씨는 21일(현지시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영국협의회 주최로 열린 '2020 남북 출신 동포 평화포럼' 행사 토론자로 나서 이같은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했다.
이날 포럼은 당초 오프라인 행사로 계획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인 '줌'을 통해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과 북한 출신 탈북민이 함께 살아가는 뉴몰든에서 남북한 동포 간 거리를 줄이기 위해 마련됐다. 앞서 남북한 동포들은 지난 1월 런던에서 설날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영국 속의 리틀 코리아 - 미리 온 평화·통일의 공간, 뉴몰동'이라는 이름 하에 열린 이날 포럼에서 각각 남북한 대표들은 그동안 서로에 대해 갖게 된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공유했다.
사회를 맡은 채은정 민주평통 영국협의회 탈북자 교류 분과 위원장은 "뉴몰든에서 남과 북이 10년째 공존하고 있다. 식당이나 마트, 이삿짐업체 등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깊이 얽혀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아직 복잡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한 신문경 리치먼드 대학 박사는 "남과 북의 언어 변화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70년간 서로 다른 정치·사회·경제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는 점이 실감났다"면서 "한국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일반어의 38%, 전문어의 66%에서 남북한이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고 전했다.
남과 북의 평화적 통일에 앞서 해외에 사는 한민족으로서 서로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떤 점이 필요할까.
박씨는 "한국민과 탈북민들 사이에는 편견보다 무서운 선입견, 고정관념이 있다. 한국분들의 얼굴을 대하면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면서 "공동체 역할이 중요하지만 개인도 중요하다. 선입견을 없애고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신부터 한국민들과 더 많은 소통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민주평통 영국협의회 부간사인 임혜정씨는 "영국에서는 북이든 남이든 소수민족일 뿐이다"면서 "아이들이 소수민족으로 받는 차별을 최소화하는 게 어른들의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 어른부터 화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값진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거창한 것보다 가벼운 커피 모임, 맥주 한잔하는 모임부터 꾸준히 갖기를 바란다. (북측) 고선영 선생님께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다"고 밝히자 고씨가 곧바로 수락의 의미로 엄지를 들어 보이기도 했다.
솔직한 대화가 오간 토론회를 마치자 사회자인 채 분과 위원장은 "영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우리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한반도 역시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박은하 주영 한국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 유럽 내 여러 나라의 민주평통 회원 및 한인 사회 관계자들이 온라인으로 참석해 남북한 동포들의 발언을 하나하나 유심히 지켜봤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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