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피노체트 헌법' 폐기 여부 결정할 역사적 국민투표
새 헌법 제정 여부·제헌 주체 결정…코로나 속에도 투표 열기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칠레 국민이 '피노체트 헌법' 폐기와 새 헌법 제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역사적인 투표를 시작했다.
25일(현지시간) 칠레 전역 2천715명의 투표소에선 1천480만여 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새 헌법 제정 여부와 초안 작성 주체를 묻는 국민투표가 진행 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유권자들이 직접 투표할 펜을 지참하는 등 엄격한 보건지침 아래 치러지지만 어느 때보다 투표 참여 열기가 뜨겁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인적이 줄었던 거리는 모처럼 마스크 쓴 투표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50%에 그쳤던 2018년 대통령 선거보다 높은 투표율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국민투표는 지난해 10월부터 칠레 전역을 뒤흔들었던 사회 불평등 시위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수도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당시 시위는 교육, 의료, 임금, 연금 등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확대됐고, 시위대는 이러한 제도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칠레 헌법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1973∼1990년)인 1980년대 제정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됐으나 근간은 유지됐다.
새 헌법 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현행 헌법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이로 인한 불평등 심화에 책임이 있으며, 국민의 기본권을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새 헌법 제정 반대파는 현행 헌법 덕에 칠레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새 헌법 제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불확실성만 키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도우파 성향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새 헌법 제정에 부정적이었지만, 30명 넘게 숨진 지난해 격렬한 시위 속에 결국 국민투표 시행에 합의했다. 투표는 당초 지난 4월로 예정됐다가 코로나19로 한 차례 연기됐다.
이번 국민투표의 질문은 총 두 가지다.
새 헌법 제정을 원하는지, 원한다면 새 헌법 초안은 누가 작성해야 하는지다. 두 번째 문항에서 유권자들은 내년 4월 새로 선출될 시민 대의원들로만 구성될 제헌의회와 기존 의원들과 시민 대표들이 50%씩을 차지하는 혼합 제헌의회 중에서 양자택일하게 된다.
두 문항 모두 과반 득표하는 쪽이 승리하게 되는데 여론조사에선 줄곧 새 헌법 제정 찬성이 우세했다. 주로 찬성은 70% 안팎, 반대는 20% 미만을 기록했다.
제헌 주체 문항에선 기존 정치인들을 배제한 순수 제헌의회를 지지하는 여론이 다수였다.
여론조사대로 결과가 나온다면 칠레는 40년 만에 새 헌법 제정에 나서게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칠레 사회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피노체트의 유물을 폐기하고 군부 독재 시절과 단절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1988년 피노체트 집권 연장 여부를 물은 국민투표와 비교되기도 한다. 당시 칠레 국민은 과반의 반대표를 던져 군부 종식을 끌어냈다.
다만 이번 국민투표 이후에도 시민 대표 선출과 초안 작성 과정 등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만큼 새 헌법이 탄생할 때까지 진통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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