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 삼성전자로 본 경영성적…주가 50배, 시총 500배↑
주가 2만7천원→134만원, 시총 4천억→197조
(서울=연합뉴스) 박진형 기자 = '주가는 50배로, 시가총액은 500배로'.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이끈 27년 간 삼성전자의 눈부신 약진을 압축한 수치다.
25일 삼성전자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1987년 11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당시 삼성전자의 주가는 2만7천원대였다.
시가총액도 4천억원대로 국내 증시 시총 순위는 한국통신, 포항제철(현 포스코) 등에 밀려 10위권에 불과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성전자는 가전시장에서 금성전자(현 LG전자)에 밀려 2인자에 가까웠다.
1987년 연간 매출은 2조3천813억원,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1천127억원, 345억원에 그쳤다.
삼성전자를 가전업체에서 지금의 세계적인 정보기술(IT)업체로 도약시킨 최대 원동력은 이 회장이 주도한 반도체 사업 진출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경영 일선에 나서기 이전인 이미 1974년 한국반도체를 사재로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취임 직후인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합병시킨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회장 취임 5년 차인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잘 알려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 경영을 추구하는 '제2창업'에 나섰다.
삼성은 이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단 한 번도 세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성장을 계속했고 삼성전자 주가도 1994년 5만원, 1995년 10만원을 각각 돌파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휴대전화 시장 개척에 착수했다.
1994년 첫 휴대전화 출시 이후 품질 문제 등으로 시장의 외면을 받자 이 회장은 1995년 구미사업장에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모아 불에 태우는 충격적인 '화형식'을 진행하며 품질 개선을 이끌었다.
그 결과 삼성전자 휴대전화는 그해 국내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이후 세계적으로 성장, 반도체와 함께 삼성전자를 먹여 살리는 양대 기둥으로 발전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삼성전자 주가는 그해 12월 말 한때 3만원대까지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급속한 경제 회복과 반도체·휴대전화 '쌍끌이'가 주도한 실적 성장으로 1999년 한국통신을 넘어 국내 시총 1위에 올랐고 2004년 50만원대를 넘어섰다.
이후 수년간 50만~60만원대에서 횡보하던 삼성전자 주가 수준이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된 계기는 2010년 무렵 찾아왔다.
2007년 첫 출시된 애플 아이폰이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장악하면서 삼성전자는 한때 위기를 맞았다.
삼성전자는 특별검사 수사로 경영에서 한때 물러났던 이 회장이 2010년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면서 그룹 역량을 총 결집한 '갤럭시S'를 내놓으며 스마트폰 시장에서 본격 추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주가도 치솟아 2011년 1월 사상 처음으로 100만원을 돌파했다. 이어 갤럭시S2로 2011년 3분기 애플을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 판매량 1위에 오른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상승세를 타 2012년 12월 150만원까지 치솟았다.
결국 2014년 5월 이 회장이 병환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당시 삼성전자 주가는 133만5천원, 시총은 196조6천446억원(2014년 5월 9일 종가 기준)에 이르렀다.
1987년 회장직 취임 당시와 비교하면 주가는 단순 수치로 약 50배(증자·액면분할 등 반영한 수정주가 기준 약 100배), 시총은 약 500배로 치솟은 셈이다.
실적도 2014년 연결기준 연간 매출 206조2천60억원, 영업이익 25조251억원, 순이익 23조3천944억원으로 1987년과 비교하면 매출은 86.6배, 영업이익은 222.1배, 순이익은 678.1배로 부풀어 올랐다.
jh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