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정치싸움에 미국 과학 '양치기 소년' 됐다
WP "트럼프 말·입김에 신뢰 상실…코로나19의 또다른 희생양"
'백신·보건당국 불신' 여론 확산…백신 승인 시 신뢰 훼손 우려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 속에 미국에서 과학이 신뢰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코로나19 팬데믹의 또 다른 희생자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라며 11일(현지시간) 미국 내의 이 같은 시류를 진단했다.
현재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미국의 여론에는 무관심과 불신이 관측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올해 9월 설문결과를 보면 코로나19 백신이 나오면 결단코 즉시 접종하겠다는 응답자는 21%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5월 42%에서 반 토막으로 급감한 수치라서 더 주목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비롯한 보건당국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들을 향한 불신 수준도 높게 형성되고 있다.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지난 9월 중순 발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FDA가 '미국인의 이익을 지켜줄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미국인 40% 이상이 크게 믿지 않거나 아예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WP는 이 같은 불신의 원흉으로는 코로나19 신약 후보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섣부른 평가를 먼저 지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긍정적인 초기연구 결과가 나오면 특유의 과장 화법을 동원해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신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예방약으로 먹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곧 뒤집어져 현재 의료계에서는 그 약을 코로나 19 치료에 권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코로나19에 감염된 뒤 처방받은 제약업체 리제네론의 항체 치료제도 극찬했다.
그러나 의학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한 스테로이드 등 여러 약물을 쓴 까닭에 항체치료제의 기능을 속단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약업체들인 리제네론, 일라이릴리가 각자 개발하고 있는 단일항체 약물에 대한 긴급사용 승인을 지난주 FDA에 요청했을 때에도 지나치게 흥분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사실과 달리 이들 약품을 코로나19를 치료하는 수단으로 부르며 FDA 과학자들이 심사해야 함에도 곧 승인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꾸준히 터져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성급하거나 그릇된 발언 뒤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세계 최대의 코로나19 피해국으로 전락해 부실 대응 논란에 휘말리자 획기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고대해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정치 쟁점화하면서 과학자들의 결정이 휘둘릴 수 있다는 점도 미국 내에서 과학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FDA는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의 입김으로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의 긴급사용을 승인했다가 나중에 철회해 망신을 당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정책을 결정하는 FDA와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등은 백악관의 정치적 간섭을 계속 받고 있다.
미국 최고의 전염병 권위자인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 소장은 WP 인터뷰에서 "압력밥솥 안에 있는 것 같은 처지"라며 "이런 상황은 비슷한 것조차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정치가 규제 당국에 입김을 넣게 되면 나중에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된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보건당국 승인을 받더라도 신뢰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보건 전문가인 대니얼 카펜터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극심한 정치 압력 속에 FDA가 대중의 광범위한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양극화한 유권자들, 선거에 유리한 쪽으로 정부를 운영하려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이 있는 데다가 선거운동 한복판에서 팬데믹이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과학계가 처한 난국을 설명했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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