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 '누리온' 개통 2년…"우수 연구 성과 창출 기여"
163개 기관 3천여명 연구자 437만여건 계산…학술 논문 275건 성과
"2023년께 슈퍼컴 6호기 개발·서비스 예정…엑사급 슈퍼컴은 아직"
(서울=연합뉴스) 정윤주 기자 = "슈퍼컴퓨터는 단순히 계산만 잘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과학·산업 기술 경쟁력을 키우고 궁극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심 도구입니다."
2018년 11월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을 개통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염민선 슈퍼컴퓨팅응용센터장은 슈퍼컴퓨터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염 센터장은 2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KISTI 슈퍼컴퓨터 연구성과 기자간담회'에서 "선진국과 유수 해외 기업은 기술 수출을 제한하는 등 슈퍼컴을 '무기화'하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나라도 이에 필적할 모델을 개발해 국내 과학 기술 경쟁력을 키워야 하고, 슈퍼컴 모델 개발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슈퍼컴퓨터는 대용량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분석·처리하는 시스템이다.
누리온(CRAY CS500)은 1988년 1호기 도입 이래 5번째로 구축된 국가 슈퍼컴퓨터다. 누리온의 이론성능은 25.7페타플롭스(Pflops)로 1조에 2경5천700조번의 부동(浮動) 소수점 연산을 할 수 있다. 이는 빛이 1m를 움직이는 아주 짧은 시간에 8천570만번의 실수 연산을 할 수 있는 속도다.
누리온의 코어 수는 약 57만개로, 고성능 PC 7만1천252개를 합한 것과 같다. 70억명이 420년간 계산할 양을 1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다.
누리온 개통 후 2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KISTI 측은 누리온이 양적·질적으로 우수한 연구 성과를 선보였다고 자평했다.
2020년 9월 기준 누리온은 163개 기관 3천37명의 연구자가 활용해 437만여 건의 작업을 수행했다. 누리온을 활용한 결과 275건 학술 논문이 발표되는 성과가 나왔다.
연구자들은 누리온을 통해 기존 슈퍼컴퓨터 4호기보다 45배 이상 코어를 활용하고 25배 이상 사용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소재·바이오·우주 등 거대 연구 분야에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KISTI는 '초고성능컴퓨팅 기반 R&D 혁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된 연구에 누리온을 무상 제공한다. 지난 2년간 405개 과제에 총 92억 CPU 시간을 지원했다.
이정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박사팀은 누리온을 이용해 지구 온난화의 주요인인 이산화탄소(CO₂)를 제거하는 흡착제를 개발했다.
이준희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 연구팀은 '산화 하프늄(HfO₂)'에 있는 산소 원자에 전압을 가해 원자간 탄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이용해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의 집적도를 1천배 이상 높이는 성과를 얻었다.
김광수 UNIST 교수 연구팀은 탄소 기반 소재에 백금(Pt)을 균일하게 분산시킴으로써 상용 촉매보다 성능이 뛰어난 수소 생성 촉매를 개발했다.
최선 이화여대 교수와 이정원 서울대 교수 연구팀은 아미노산 '아르기닌'이 세포질로 이동하는 것을 막아 간암 세포를 굶겨 죽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신지혜 한국천문연구원 박사와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 연구팀은 약 110억∼50억년 전에 달하는 근(近) 우주의 은하와 은하단의 진화를 연구하고자 대규모 수치 실험을 수행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누리온이 미국, 중국, 일본으로 구성된 슈퍼컴퓨터 '3강 체제'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점은 한계로 작용한다.
슈퍼컴퓨터는 매년 6월 '세계 슈퍼컴퓨팅 콘퍼런스(ISC)'와 매년 11월 '슈퍼컴퓨팅 콘퍼런스(SC2019)'를 통해 '톱(Top) 500' 순위가 공개된다.
새로운 슈퍼컴퓨터가 공개되거나 기존 슈퍼컴퓨터가 퇴역하는 등 변동사항이 생기면 순위는 바뀐다.
2018년 6월 누리온은 전 세계에서 11위로 빠른 슈퍼컴퓨터였지만, 2020년 6월 일본이 최신 슈퍼컴퓨터 후가쿠를 발표하면서 누리온의 순위는 17위로 곤두박질쳤다.
게다가 미국은 1초에 약 100경 번 연산할 수 있는 엑사급(exascale) 슈퍼컴퓨터를 내년께 내놓을 예정이고, 중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지에서 2022∼23년 공개를 목표로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개발 중이다.
이에 한국에서도 더 높은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한국이 엑사급 슈퍼컴퓨터 개발에 착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간 5년 단위로 슈퍼컴퓨터가 개발됐던 점을 고려해보면 이르면 2023년께 슈퍼컴퓨터 6호기 서비스를 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개발할 슈퍼컴퓨터의 규모와 성능을 정하고, 투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와의 소통이 필요하다. 개발에 약 1조5천억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일본 후가쿠처럼 거대 예산을 투입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이에 대해 염 센터장은 "국내 연구자들은 엑사급 수준 슈퍼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제품을 개발한 뒤 국내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경제성이 부족해 아직 고성능 슈퍼컴을 개발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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