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스가시대] '아베 내각 원년 멤버' 스가의 역사·국가관은

입력 2020-09-14 15:35
수정 2020-09-14 18:00
[日스가시대] '아베 내각 원년 멤버' 스가의 역사·국가관은

우익단체 4개 가입·아베 야스쿠니참배 만류…한일관계 당장 변화 없을듯

총무상 시절 불도저식 정책 추진해 존재감…납치문제로 아베와 협력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16일 일본의 차기 총리로 선출될 예정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중앙 정치에 진출한 것은 만 47세였다.

14일 실시된 총재 선거에 출마한 경쟁 후보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이 만 29세 때 당시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것에 비하면 매우 늦었다.

세습 정치인과 달리 늦게 국회에 입성했으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1차 집권때 구성된 내각의 '원년 멤버'로 참여한 뒤 특유의 추진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 47살에 국회 입성…관료 압박하며 불도저식 활동

스가는 시의원 재선을 거쳐 1996년 10월 중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요코하마 일대를 지역구로 하는 '가나가와 2구(區)'에서 처음 당선됐다.

현재까지 연속 8선을 기록했다.

스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에서 국토교통성 정무관, 경제산업성 정무관, 총무성 부(副)대신 등을 지냈다.

2006년 9월 제1차 아베 내각 발족과 더불어 총무상에 임명되면서 첫 입각을 한 스가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이 투영된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는 2006년 11월 10일 하시모토 겐이치(橋本元一) 당시 NHK 회장에게 NHK의 단파 라디오 국제방송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특히 유의해서" 방송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방송법에 따른 총무상의 권한을 명령의 근거로 내세웠으나 총무상이 구체적인 사안을 지정해 방송을 명령한 첫 사례라서 논란을 일으켰다.



언론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고 방송 명령에 반발한 시민단체가 위헌적 조치라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NHK 수신료 인하 구상에 관해 의문을 드러낸 총무성 과장을 교체해 "아베 정권의 괴벨스"(요제프 괴벨스,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스가는 "나의 강한 결의를 안팎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며 당시 조치가 효과적이었다고 후일 자평했다.

스가는 "관료는 '인사'에 민감하며 이를 통해 대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헤아린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은 2차 아베 정권 발족 후 총리관저의 인사권을 강화하는 내각인사국 설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 납치 문제로 아베와 손잡아…대북 압박 정책 추진

스가는 일찍부터 납치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대한 압박을 추진해 왔다.

북한 원산과 일본 니가타(新潟)현을 오가는 북한 화객선 만경봉호가 북한의 대일 공작 활동 거점이며 사령탑이나 금고 역할을 하고 있다며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을 저지하기 위해 2002년에 항만법 개정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민당이 입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스가는 의원입법을 하기 위해 고노 다로(河野太郞) 의원(현 방위상) 등을 모아 '대북외교 카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관련 검토에 돌입했다.



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 도쿄공업대 교수는 저서 '자민당, 가치와 리스크의 매트릭스'에서 당시 관방 부(副)장관이던 아베 총리가 스가의 주장에 주목해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납치 문제를 매개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분석했다.

만경봉호의 입항을 막는 '특정 선박의 입항 금지에 관한 특별조치법'는 결국 2004년 6월 공포됐고 스가는 이것이 자신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법을 만든 몇 가지 운 좋은 사례 중 하나였다고 저서 '정치가의 각오-관료를 움직여라'에서 밝힌 바 있다.

스가는 사실상 북한의 주일 대사관 기능을 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에 과세하는 흐름을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총무 부(副)대신 시절 각 지방자치단체가 조선총련에 대해 지방세인 고정자산세를 면제하는 것에 제동을 걸기 위해 총무성 차관 통지를 발송하도록 실무자를 압박했다.



◇ 우익 4개 단체에 몸담은 스가…역사·국가관은

스가의 국가관이나 역사관에 관해서는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역사·사회 활동가인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의 저서 '일본회의의 전모'를 보면 스가 관방장관은 대표적인 우익 단체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신도정치연맹(신정련) 국회의원 간담회,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창생 '일본' 등 4개 우익단체에 모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돼 있다.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이력이 있다.

스가는 2014년 2월 2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출석해서 "나도 관방장관이 되기 전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지만 혼자서 조용하게 위원(질문자인 이시제키 다카시<石關貴史> 의원)과 같은 방식으로 참배했다"고 발언했다.

2011년 8월 20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는 같은 해 패전일(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스가의 이런 행적이 그가 골수 우익임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그가 각료 신분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 2013년 10월과 12월에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려고 할 때 '언젠가 가더라도 지금은 안 가는 것이 좋다', '경제 재생이 우선이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만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는 2013년 12월에 결국 참배했다.

나카지마 교수는 스가가 일본의 전도(前途)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모임' 회원이 되는 등 "우파적 역사 인식을 지닌 의원과의 관계를 깊게 해왔다"면서도 "스가 씨가 우파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가인지는 의문이 남는다"고 분석했다.



스가는 2014년 5월 발행된 주간지 선데이마이니치(每日)와의 인터뷰에서 "정직하게 말하면 국가관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나에게는 없었다. (웃음) 아베 씨의 이야기를 듣고 대단하구나 (생각했다). 아베 씨가 관방부장관 때였다"고 말했는데 이런 점에 비춰보더라도 우익적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일 간 역사 이유로 눈을 돌리면 스가는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의 판결이나 일본군 역사 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국과 대립하는 시각을 꾸준히 내세웠다.

일본 정부 대변인이라는 지위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가 현재도 아베 정권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입장 변화를 기대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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