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미국이 앓던 만성질환의 '퍼펙트 스톰' 코로나 사태
고비용 의료보장 체계·연방주의·자유주의 문화에 취약한 리더십 더해지며 재난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강대국(power)이란 표현으로도 모자라 초강대국(superpower)으로 불리는 미국이 바닥없는 수렁으로 추락하고 있다.
통상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 과장이 담긴 수사이기 십상이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놓고 보면 이 문장은 너무도 축어적이다.
이 초강대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지난 23일(현지시간) 400만명을 넘어섰다. 전 세계 감염자의 4분의 1이다.
의료 체계의 미비나 고의적 누락 등으로 실제보다 코로나19 전염 규모가 크게 축소된 나라들이 있겠지만, 미국에서도 확인된 감염자 수는 실제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인구 수와 견준 상대적 비율을 봐도 주요 국가 중 이만큼 심하게 타격을 입은 나라는 드물다. 감염자가 전체 인구의 1%를 훌쩍 넘겼는데 코로나19 환자가 1%를 넘은 나라는 브라질, 페루, 칠레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고 코로나19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독일처럼 사망자가 적은 것도 아니다. 미국의 사망자는 14만여명으로 역시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의 약 4분의 1이다.
미국으로서는 수모라 할 만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미 언론 보도를 보면 코로나19란 대재앙의 원인은 산재해 있다. 모든 '퍼펙트 스톰'이 그렇듯 미국의 코로나19 재난도 여러 가지 사회구조적 문제와 정치 리더십, 문화적 토양 등이 복합적으로 중첩되며 빚어진 결과다.
접근성 낮고 고비용 구조인 의료 보장 체계 때문에 코로나19 의심 증상이 나타나도 병원 가기를 주저하다 상황이 악화하거나 죽는 사람이 나온다.
초기엔 코로나19 검사 비용이 보험 대상에 들어가지 않아 검사받는 데만 수백만원이 들었다는 사례가 보도되기도 했다.
공공보건 부문에 대한 투자 축소는 이 분야의 인력·장비 감축으로 이어졌고 로버트 레드필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공공보건 부문이 보유한 의료 장비가 낙후해 검사를 많이 할 수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소득 수준이 낮은 흑인·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이민자가 청소·농장·육류 가공공장·물류 공장 등 필수 업종에 몰려 있는 고용 구조 탓에 이들은 코로나19 사태 속에도 일하러 나갔다가 감염됐다. 흑인·히스패닉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로 환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주 정부의 자율성·자치권을 보장하는 미국의 연방주의는 일사불란하고 조직적인 국가 차원의 대응을 어렵게 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의료 물자·장비·인력을 지원해달라는 주지사들과 주 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대통령 간의 빈번한 설전은 한국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장면이다.
개인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적 자유주의는 코로나19 사태 속에도 수영장 풀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파티를 즐기고 해변 백사장이 새까맣게 인파로 뒤덮이는 장면을 연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미국 예외주의가 우리의 기저질환이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 전염병(코로나19)은 그저 가까이 있거나 공기 중 침방울로 인해 전염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택·보험·교통·임금·보육·식량 안보의 불평등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지금 실패는 이전의 실패에서 발원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있다. 기후 변화를 사기라고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를 겨울철 유행병인 독감의 변종 정도로 생각했다.
전염병 위기 극복을 위해 전문가들의 조언과 의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경제 정상화란 정치적 어젠다에 방점을 찍고 주지사들에게 경제 조기 재가동을 압박했다.
코로나19 방역의 유일한 무기로 거론되는 마스크 착용이 미국처럼 높은 정치적 상징을 띤 행위가 된 나라도 드물다.
백신 접종 거부 운동이 일고 과학을 배격하는 정서가 강한 미국의 반지성주의 토양이, 마스크 착용을 꺼리는 국가 지도자와 만나면서 빚어진 희한한 풍경이다.
미국의 추락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흔히들 미국은 일급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국가라고 한다.
지금까지 코로나19 대응에서 드러난 모습은 애석하게도 그런 엘리트들의 저력마저 정치의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뒤틀리는 양상이었다.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코로나19의 격랑에 휩쓸린 한국의 가족들을 걱정하던 기자는, 이제 외려 '별일 없냐'는 안부 전화를 받는 처지가 됐다. 돌이켜보면 그때 한국을 휩쓴 건 산들바람이었고, 정작 태풍이 상륙한 곳은 미국이다.
몇 달째 이어지는 봉쇄령과 학교 폐쇄로 24시간 온 가족이 집안에서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기자로서는, 어서 빨리 미국이 그 저력을 발휘해 코로나19를 좀 잡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sisyph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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