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성공 고이케 도쿄지사, 日 최초 여성 총리 꿈 이룰까(종합)

입력 2020-07-06 03:15
재선 성공 고이케 도쿄지사, 日 최초 여성 총리 꿈 이룰까(종합)

거리유세 없이 60% 육박 득표율로 재선…한국과는 '악연'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도쿄도(都) 지사(4년 임기) 선거에서 재선이 확정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67) 지사는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가 강한 일본 사회에서 '유리천정'을 뚫어온 여성 정치인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5일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감염 확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거리 유세를 한 차례도 하지 않고 6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압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현직 프리미엄이 작용해 이번 선거전은 일찌감치 고이케 지사 쪽으로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독자 후보를 내지 않은 채 필요에 따라 손을 잡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고이케 지사를 후원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야당 세력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표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아 고이케 지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특히 이번 선거를 앞두고 확산한 코로나19 사태는 고이케 지사에게 현직 프리미엄을 잔뜩 안겼다.

고이케 지사는 지난 3월 2020도쿄올림픽·패럴림픽이 코로나19를 이유로 내년 7월로 연기된 직후 '도시봉쇄'라는 말까지 동원해 긴급사태로 대응해야 한다고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유권자들의 호감을 샀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이케 지사는 중앙정부가 긴급사태를 선포한 후에는 외출하지 말고 집에 머물라는 의미인 '스테이 홈'을 주창하는 등 메시지 전달력이 강한 짧은 구호성 문구를 활용해 시선을 끌었다.

코로나19와 관련한 기자회견에 직접 나서 대중 노출 빈도를 높인 것도 선거에 도움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쿄의 1천100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시하는 이슈로 코로나19 대응을 꼽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이케 지사는 잦은 기자회견을 통해 도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이것이 고이케 지사의 1기 도정(都政) 전반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 방송국 앵커에서 정치인으로…변화무쌍한 정치 경력

고이케 지사가 걸어온 길은 천변만화라 할 만큼 변화무쌍하다.

1952년 일본 효고(兵庫)현 태생인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간세이가쿠인(關西學院)대학 사회학부를 다니던 중 인생의 첫 번째 전기를 맞는다.

유엔 공식 언어로 아랍어가 추가됐다는 신문 기사를 본 뒤 아랍어 통역가 꿈을 품고 아버지가 무역상으로 일하던 이집트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이렇게 카이로대학을 졸업하고 아랍어 통역가로 활동하다가 1979년 니혼테레비(TV) 보조 앵커를 맡으면서 방송계로 진출했다.

1988~1990년에는 테레비(TV)도쿄 메인 앵커로 활약하는 등 여성 캐스터로 유명 인사가 됐다.

방송계에서 높인 지명도는 정치 무대로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1992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이끌던 일본신당 소속으로 참의원 비례대표로 처음 국회에 입성하고, 이듬해 고향인 효고현 지역구에서 중의원 금배지를 다는 것으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2002년 자민당에 안착할 때까지 신진당과 보수당을 거치는 등 여러 차례 당적을 바꿨고, 2014년까지 효고현과 도쿄를 지역구로 두고 8선(비례대표 1번 포함)을 달성했다.

중의원으로 있는 동안에는 환경상 등을 거친 뒤 아베 총리의 제1차 내각(2006~2007)에서 외교안보 관련 총리 직속 보좌관과 첫 여성 방위상을 지내 일본의 '콘돌리자 라이스'(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의 여성 국무장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자민당이 야당 시절인 2012년 총선 직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현 총리와 맞붙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을 지지하는 선택을 하면서 자민당 내의 비주류로 전락해 2차 아베 내각에선 별다른 자리를 맡지 못했다.

이것이 고이케 지사에게는 전화위복이 됐다.



2016년 7월 부적절한 정치자금 논란 끝에 사퇴한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지사의 후임을 뽑는 선거에 자민당 당적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민당이 추천한 마스다 히로야(增田寬也) 후보를 꺾고 도쿄도의 수장이 된 것이다.

고이케 지사는 여세를 몰아 '도민퍼스트회'라는 지역 정당을 만들어 2017년의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자민당을 꺾고 전체 127석 중 49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고이케 지사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 곧 총리 자리를 넘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사학비리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아베 총리가 북핵 위기를 앞세운 위기돌파 카드로 중의원을 해산한 데 따른 2018년 10월의 총선을 한 달가량 앞두고 '희망의 당'을 꾸려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보수가 아닌 사람들은 배제하겠다"는 발언으로 '배제 정치' 논란에 휩싸이면서 자민당 벽을 넘지 못하고 겨우 10% 수준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정치 경력상의 수많은 곡절은 고이케 지사에게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도 안겼다.



◇ 재선 성공 고이케 지사 '女帝' 꿈 이룰까

고이케 지사는 이번에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여제(女帝) 고이케 유리코'라는 제목의 평전이 출간되는 등 고이케 지사는 '여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여제라는 별명은 고이케 지사가 재선을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로 나아가는 길을 다져나갈 것이라는 관측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변수가 남아 있긴 하지만 1년 연기된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이 정상적으로 치러진다면 고이케 지사는 개최 도시 수장으로서 세계적으로도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 구조상 고이케 지사의 국내외 지명도가 높아지더라도 도쿄도(都) 무대를 넘어 일본을 이끄는 총리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의원내각제 특성과 일본 정치 풍토를 들어 여성 총리가 탄생하는 것이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유권자가 직접 뽑는 지자체장과는 달리 의원내각제에선 총리를 제1당 총재가 맡는 구조여서 지지 파벌 확보 등 집권당 내 위상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고이케 지사는 그런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 일본 우파 진영의 대표 정치인…한국과는 '악연'

고이케 지사는 일본 주류 정치인 가운데 우익 성향이 강한 인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만일 아베 총리가 나가고 그 자리를 고이케 지사가 승계한다고 가정할 경우 한일 관계가 더 악화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일본의 자치행정 영역에선 개혁적이지만 역사나 외교 문제에서는 아베 총리 이상으로 극우 성향을 보이는 고이케 지사가 걸어온 행보를 보면 그런 전망이 무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07년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 당시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자민당이 야당 시절이던 2011년 일본 내 혐한 단체인 '재특회' 강연에 참석해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2014년에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를 철회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도쿄도 지사가 되고 나서는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를 추도하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에 전임 지사들이 1970년대 이후 관례로 보냈던 추도문을 2018년부터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해 거센 비난을 샀지만, 지금까지 그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2003년 3월에는 일본 우파 잡지인 '보이스'에 "군사, 외교적인 판단에 따라 핵무장 선택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전쟁 포기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평화헌법 조항으로 불리는 일본헌법 제9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고이케 지사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는 한국 내 시각이 편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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