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뒤집어쓴 미 남부사령관 기마상…130년만에 사라지나

입력 2020-06-10 04:27
페인트 뒤집어쓴 미 남부사령관 기마상…130년만에 사라지나

'노예제 옹호' 남부군 이끈 리 장군…버지니아주지사 철거 방침에 법원 일단 제동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미국 워싱턴DC와 붙어있는 버지니아주의 주도 리치먼드의 모뉴먼트 거리엔 4m가 넘는 기마상이 서 있다.

기마상을 받치는 단의 높이도 15m나 된다. 1890년 5월 이 자리에 세워져 130년간 리치먼드의 역사를 낱낱이 지켜봤다.

남북전쟁 시절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기마상이다. 1870년 리 장군이 사망한 뒤 제작에만 20년이 걸렸는데 프랑스에서 제작돼 바다를 건너온 기마상이 설치될 때 1만명의 시민이 나와 환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 장군의 동상은 지금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받침대는 온통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페인트 구호로 뒤덮였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이 노예제를 옹호한 탓이다. 특히 남부군을 이끌었던 리 장군은 인종차별의 선봉처럼 인식돼 있다.

이 기마상은 철거 운명에 놓였다. 민주당 소속인 랠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가 지난 4일(현지시간) 동상을 철거하고 창고에 넣겠다고 밝힌 것이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 전역에 확산하고 리 장군의 동상 역시 타깃이 되자 전격 철거가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한 주민이 소송을 냈다. 기마상을 세울 당시 애정을 가지고 보호하겠다는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기마상이 선 자리는 원래 담배밭 가장자리 야구장이었는데 이 부지는 헨리코 카운티 소속이어서 리치먼드 당국이 넘겨받았다. 소송을 낸 윌리엄 그레고리는 자신이 당시 부지 인도에 서명한 이들의 증손자라고 주장했다.

리치먼드 법원은 일단 10일간 철거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는 그레고리의 요청을 8일 받아들였다. 노덤 주지사의 철거 방침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노덤 주지사 역시 철거를 언제 하겠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은 상태다.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이 그 지역 리 장군 동상을 철거하기로 했다가 이에 항의하는 백인우월주의자 등 극우 시위대가 몰려와 폭력시위를 벌인 바 있다.



리 장군은 버지니아주 백인들이 꼽는 대표적 버지니아 태생 인사다. 미 의회의사당에 동상을 세우려고 주마다 지역 태생 대표 인물 2명을 뽑을 때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리 장군이 선정됐을 정도다.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도 버지니아 태생이지만 탈락했다. WP는 "버지니아의 많은 백인에게 리 장군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급"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에서는 리 장군의 이름을 찾아보기 쉽다. 대학에도, 육군 기지에도, 고속도로에도 리 장군의 이름이 붙어 있다.

WP는 "노덤 주지사는 2017년 샬러츠빌의 백인우월주의자 폭력시위 이후부터 기마상 철거를 지지해왔으나 지역 정서를 살펴왔다"면서 이 때문에 노덤 주지사가 철거 시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na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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