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돈세탁' 미 공소장 보니…'감시망 피하자' 백태

입력 2020-05-29 11:53
'북한 돈세탁' 미 공소장 보니…'감시망 피하자' 백태

해외 비밀지점과 250곳 유령회사 동원…송금 막히자 미국에 허가 신청

대량살상무기 거래 흔적도 나와…"중국 '북 제재 위반 방조' 경고 의미"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 법무부가 북한인과 중국인을 25억달러(3조1천억원) 돈세탁 관여 혐의로 무더기 기소하며 공개한 공소장을 보면 북한이 달러 송금과 조달을 위해 어떤 방식을 동원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북한이 조선무역은행(FTB)을 중심으로 해외 비밀 지점과 유령회사를 통해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며 달러 결제를 하는 과정이 자세히 소개됐기 때문이다.



재무부의 경제 제재와 별개로 법무부가 이례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 범죄로 기소한 것은 제재와 대화 병행 기조 속에 북한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또 중국에 있는 은행이나 유령회사들이 대거 관여했다고 밝힌 것은 제재 이행에 미온적이라며 불만을 표출해온 중국을 겨냥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돈세탁에 250개 유령회사와 비밀 지점 동원

법무부가 북한 국적 28명과 중국 국적 5명을 기소하며 적용한 혐의는 돈세탁, 은행 사기, 대북 제재규정 등 8가지다. 추적한 기간은 2013년 3월부터 올해 1월까지다.

공소장에는 북한이 달러 거래를 위해 조선무역은행을 정점으로 해외의 비밀지점과 무려 250개 유령회사를 동원한 것으로 돼 있다.

또 조선무역은행이 다른 나라의 금융기법을 연구하기 위해 외국 금융기관과 긴밀히 협력, 관련자들을 해외로 보냈다고 적시했다.

이렇게 해외로 나간 이들은 미국이 금지한 달러 거래를 위해 비밀 지점을 개설해 운영했는데, 대상국은 중국과 러시아 외에 태국, 리비아, 오스트리아, 쿠웨이트가 포함됐다.

이들은 상품을 조달하고 달러화로 결제할 수 있도록 유령회사도 설립해 운영했고, 이를 위해 현지 협력자들을 구했다.

특히 북한이 개입된 게 드러나 대북 제재 탓에 달러 거래가 이뤄지지 않을 것을 우려, 대리은행을 통한 달러 거래 시 이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대리은행이란 외국 특정 은행의 계좌로 송금할 때 이를 중계해주는 역할을 하는 은행을 말한다. 북한은 미국 금융기관을 직접 이용하는 것은 물론 해외 금융기관을 통해 미국의 대리은행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소장에는 유령회사가 적발되면 또 다른 유령회사를 만들고, 문서에 최종 목적지와 거래처를 허위로 기재했다고 적시돼 있다.

50쪽짜리 공소장에는 북한이 조선무역은행 본부와 비밀 지점을 이용해 달러 거래를 시도한 과정이 지점별로 28쪽에 걸쳐 나열돼 있다.

구체적으로 선양, 주하이, 베이징 등 중국과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는 물론 오스트리아, 리비아, 쿠웨이트, 태국의 지점을 통해 송금한 사례들이 나와 있다. 중국 단둥의 조선광선은행도 등장한다.

은행 본부가 송금을 지시하면 지점에서 유령회사를 이용해 이를 실행하는 식이다. 일부는 실제 물품 구매에, 또 일부는 달러 세탁에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금이 이뤄진 기업에는 중국, 말레이시아는 물론 미국도 있다.



◇미국서 송금 차단하자 미 재무부에 승인 신청하기도

공소장에는 중국 선양 지점의 사례가 자세히 나온다. 책임자가 유령회사임이 탄로 날까 봐 중국은행의 실사에 대비, 중국인 협력자에게 합법적 구매인 것처럼 거짓 진술을 지시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대화하는 내용이 있다.

중국 은행 간 이체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문의하라는 내용, 중국 은행에 전화해 계좌 개설과 수수료에 관해 문의한 장면도 적시돼 있다.

특히 돈을 송금하려다 미국의 대리은행에서 차단돼 애를 먹는 사례도 있다.

선양 책임자가 2015년 11월 5일 유령회사인 밍정국제무역을 내세워 전자제품 구매 대금으로 30만달러를 중국 은행에 보내려 했지만, 미국 대리은행이 이를 차단했다. 일주일 후 이 제품을 판 중국 회사는 목적지를 북한에서 홍콩으로 바꾼 허위 계약서를 밍정국제무역에 보냈다.

북측 책임자는 미 재무부 규제로 인해 차단됐음을 중국 은행을 통해 알게 됐고, 같은 달 20일 함께 일하던 중국인이 재무부에 거래 승인을 요청하는 허위 신청서를 제출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또 2015년 11월 스위스 사업가로의 송금이 차단됐을 때는 이 사업가가 허위 서류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실제로 이런 서류를 꾸며 보냈다는 내용도 있다.

공소장에는 북한이 금지 물품 구매, 외화벌이 수단으로 거론되는 석탄 무역, 미사일 개발에 연결될 수 있는 물품 거래 등을 진행했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있다.

일례로 선양의 비밀 지점과 관련해서는 밍정국제무역이 중국 회사인 단둥커화를 통해 미국법상 금지된 통신장비를 구매하는 거래에 관여한 내용이 있다. 이와 관련, 미 검찰이 밍정국제무역 계좌의 190만달러를 압류했다는 보도가 지난해 나오기도 했다.

베이징 지점 관련 혐의 중에는 관련자끼리 작년 3월 선박과 항공, 로켓 기기에 사용될 수 있는 부품에서 하드웨어 결함을 언급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또 오스트리아 지점과 관련한 부분에선 책임자가 2018년 11월 북한 관련 회사의 대표에게 석탄 선적에 관해 알려줬다고 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밖에 태국 지점에선 2015년 9월 32만달러어치의 알루미늄 구매와 관련해 지급을 보증하는 이메일이 조선무역은행 본부와 오간 내용이 포함돼 있다.



◇북한 제재 재확인하고 중국에도 '경고장'

이번 기소는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북한에 대해선 북한의 달러화 거래를 미국이 추적하고 있음을 재확인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최대 압박을 통한 대화 기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번 기소는 해외 기업이 북한과의 거래를 더욱 꺼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이클 셔윈 워싱턴DC 연방검사장 대행이 "미국 금융시스템에 불법적으로 접근하려는 북한의 활동을 방해하고, 불법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증강을 위해 불법적 행위로 얻은 수익을 이용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미국이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북한이 달러 거래의 주요 창구로 중국을 이용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기소는 중국이 불법 네트워크를 얼마나 용이하게 했는지를 드러낸다"며 "유엔 회원국이 2016년 초 북한 은행의 지점을 쫓아냈다고 추정됐지만 중국의 베이징과 선양 등에서 여전히 운영되고 있음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대북제재 강화법 통과를 도운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는 WP에 "이는 중국 정부가 김정은의 대북 제재 위반을 고의로 돕고 있다는 압도적 증거를 더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이 대북 제재 이행에 적극적이지 않고 북한의 제재 위반을 방조한다는 불만을 표시해왔다는 점에서 중국의 태도 변화를 간접 촉구하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책임론,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등을 놓고 치킨게임 양상의 충돌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번 기소는 북핵 해법을 놓고도 이견을 드러내는 양국의 현 지점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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