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서 '표현의 자유·친중 역사 교과서' 놓고 갈등 고조

입력 2020-05-20 14:10
홍콩서 '표현의 자유·친중 역사 교과서' 놓고 갈등 고조

공영방송 RTHK, 경찰 풍자했다가 당국 제재로 프로그램 중단

친중국 색채 강화한 역사 교과서 도입 등도 논란 불러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지난해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로 홍역을 앓았던 홍콩에서 올해 들어 표현의 자유와 역사 교육을 둘러싸고 새로운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2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명보 등에 따르면 홍콩 방송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홍콩 통신국은 전날 공영방송 RTHK의 정치 풍자 프로그램 '헤드라이너'(Headliner·頭條新聞)와 관련한 제재를 내렸다.

신랄한 풍자로 유명한 헤드라이너는 지난 2월 14일 경찰이 목과 손에 쓰레기봉투를 두른 채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장면을 내보내며 경찰을 조롱했다. 이는 홍콩 경찰이 '쓰레기'와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필요한 마스크 등 의료진 보호장비를 경찰이 쌓아놓고 있다는 내용의 풍자극을 내보내기도 했다.

홍콩 경찰 총수인 크리스 탕 경무처장은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경찰 측은 헤드라이너를 비판하는 내용의 청원을 3천300여 건 접수했다고 밝혔다.

이에 RTHK 측은 헤드라이너가 뉴스 프로그램이 아니라, 익살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정치 풍자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했다.

홍콩 통신국은 이러한 RTHK의 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프로그램이 경찰 전체를 폄하하고 모욕했다"고 지적했다.

RTHK는 당국의 제재를 받아들여 다음 달 19일을 마지막으로 헤드라이너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RTHK 노조는 강력하게 반발했고, RTHK의 다른 시사 프로그램마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콩 범민주 진영의 클라우디아 모 의원은 "RTHK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했으며, 이번 사건은 홍콩에서 표현의 자유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비판했다.



홍콩에서는 역사 교육을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홍콩 대표인 탄야오쭝(譚耀宗)은 22일 열리는 전인대를 앞두고 한 중국신문사와 인터뷰에서 "홍콩 학생들의 역사 인식이 부족하며, 교과서도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중국 중앙정부가 관련 기관을 통해 교과서를 제공해 홍콩 학생들이 중국 역사를 배우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 유물사관에 기초해 만든 중국 본토의 역사 교과서를 홍콩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고 명보는 전했다.

한편 반중 성향의 빈과일보는 올해 9월부터 중등학교 1학년에 적용되는 새 역사 교과서를 입수해 보도하면서 "정부의 입맛에 맞춘 침투적 세뇌 교육"이라고 비판했다.

기존 교과서가 홍콩사와 중국사를 독립적으로 가르쳤다면 새 교과서는 진시황이 현재 홍콩 일대를 정복하는 부분으로 홍콩사를 시작하는 등 홍콩이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빈과일보의 이러한 비판은 중국 관영 매체의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앞서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은 지난 11일 언론 인터뷰에서 홍콩 교육과정 중 '교양학'(通識) 커리큘럼이 지난해 홍콩 시위 사태를 촉발했다며 해당 과목에 대한 개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홍콩 내 친중파 등은 2009년 정규 과정에 포함된 이 토론식 교양 교육이 학생들에게 서구 중심 사고를 갖게 하고 반중 정서를 키웠다는 비판을 제기해왔다.

홍콩 시민들은 지난 2010년 홍콩 정부가 국민·도덕 교육을 도입하려 하자 대규모 반대 시위를 통해 이를 무산시킨 바 있다.

최근에는 대학 시험의 역사 문제도 논란이 됐다.

지난 14일 치러진 홍콩 대입 시험(DSE) 역사 영역 시험에서 '1900∼1945년 이뤄진 일본의 식민 통치가 중국에 손해보다 이익을 더 줬는가'라는 문제가 나오자 중국 외교부와 관영 매체 등은 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에 홍콩 교육부 장관은 "중국 국민의 감정과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이 문제에 배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번에는 홍콩 시민 수만 명이 '홍콩시험·평가국(HKEAA)의 자율성을 보장하라'며 연대 서명을 했다.

람 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에 개입할 것을 시사했고, 이에 HKEAA는 행정장관의 지시가 있을 경우 논란이 된 역사 문제를 폐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홍콩 언론은 역사 교육 등을 둘러싸고 중국 관영 매체와 홍콩 내 친중파의 공세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것이 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에 이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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