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미국이 자랑한 노동유연성의 함정, 위기 때는 독약

입력 2020-05-17 07:07
[특파원시선] 미국이 자랑한 노동유연성의 함정, 위기 때는 독약

코로나19로 대량실업 촉발…의료보험 상실로 생계·건강 모두 위태

천문학적 재정적자 감수하고 '현금 투하'…저소득층이 더 큰 타격

스티글리츠 "코로나19, 미국서 완벽한 근거지 찾아" 꼬집어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의 경제적 여파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달러'를 공중에서 살포하다시피 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제로'(0)로 낮추고 무제한적 양적 완화에 들어갔고, 연방정부 역시 의회를 통과한 2조8천억 달러(약 3천400조원)의 실탄을 무기로 '공짜 돈'을 뿌리고 있다.



일례로 미국은 중소기업 고용 유지를 위해 급여보호프로그램(PPP)을 도입했다. 이름은 PPP 대출(loan)이지만 급여나 임차료 등 정해진 명목으로 쓰면 빚을 탕감해주기 때문에 공돈이나 마찬가지다. 기업의 신청이 대거 몰렸고, 3천500억 달러의 재원이 소진되자 2차로 3천100억 달러를 추가 배정했다.

개인에게는 현금을 직접 '투하'하고 있다. 성인 1인당 1천200달러, 아동은 500달러를 받는다. 야당인 민주당은 한 번 더 주자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직장을 잃어 실업수당을 신청하면 기존에 책정된 수당 외에 주당 600달러의 웃돈을 얹어준다. 7월 만료되지만, 민주당은 6개월 연장을 주장한다.

연방정부가 확보한 2조8천억 달러는 한 해 예산인 4조8천억 달러의 60%에 육박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민주당이 3조 달러를 추가하자고 요구하니 1년 예산을 능가하는 '초슈퍼 부양책'이 탄생할 수도 있다.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이자 가장 '부자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이 최대 재정적자까지 감수하며 왜 이렇게 고용시장에 돈을 쏟아부을까.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 격차, 빈약한 사회보장제도라는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이런 취약성은 코로나19 대유행, 이로 인한 대규모 실업 사태와 맞물려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ABC뉴스에 따르면 미국은 중간소득의 절반 이하로 사는 상대적 빈곤층 비율이 17.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매우 높다. 빈부 격차가 크다 보니 상대적 저소득층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특히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유연성은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역효과를 내고 있다.

4월 실업률은 전달의 4.4%에서 14.7%로 폭등했다.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게 차곡차곡 늘린 일자리(약 2천280만개)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조차 5월이나 6월 실업률은 20%를 넘을 것으로 예상할 정도다.

언론들은 지난 14일 기준 직전 8주간 실업수당 신청 건수를 토대로 불과 두 달 만에 3천650만명의 미국인이 직장을 잃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에 따르면 올해 미국 실업률은 작년 3.7%에서 6.7%포인트 오른 10.4%로 예상됐다. 선진국 실업률이 같은 기간 3.5%포인트, 유럽은 2.8%포인트 오를 것이라는 전망과 비교해 미국이 더 큰 타격을 받는다는 말이다.

주요7개국(G7) 중 미국 외에 실업률 증가 폭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는 이탈리아지만 증가 폭은 2.9%포인트로 미국보다 훨씬 작았다. 독일과 일본은 각각 0.7%포인트, 0.6%포인트 상승으로 예상됐다.



미국의 고용 한파가 유독 두드러진 것은 높은 노동유연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직원 해고가 까다로운 유럽은 고용 경직성이 효율성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위기 때는 역설적으로 대량 실업을 막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AP통신은 유럽 선진국의 경우 기업이 어려워져도 기존 고용 안전망을 활용해 수백만 명의 고용을 유지하며 대규모 실업을 피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반면 미국은 심한 경기침체기에 대량 해고가 발생하고 이에 의회가 대규모 긴급예산을 편성하는 임시방편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비슷했다고 한다.

AP는 한 전문가를 인용해 미국의 긴급예산은 유럽의 복지시스템 역할을 대신한다며 미국의 미비한 복지스템이 경기침체 때 노동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더욱이 미국 노동자는 경제 위기 시 의료 위기도 맞는다. 미국인의 거의 절반은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했고 34%는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같은 정부지원 프로그램을 통한다. 6%는 사보험을 들지만, 아예 보험이 없는 사각지대도 9%에 이른다.

일자리를 잃으면 직장에 의존하던 건강보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이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국가다.

반면 유럽 선진국은 급여에서 세금이나 부담금 형태로 기금을 마련하는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를 기본으로 해 미국과 상황이 다르다. 예컨대 영국은 세금으로 재원을 충당해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ABC는 최근 한 보도에서 "코로나19가 미국 의료시스템의 균열을 노출하고 확대하고 있다"며 "의료시스템은 이미 결함이 있었고, 대유행은 이 실패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이번처럼 전염병으로 인해 대량 실업이 발생하면 많은 미국인은 경제적 고통과 건강 불안 등 이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가뜩이나 취약한 저소득층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자리를 잃거나 근무 시간이 줄어든 비율은 연소득 4만 달러(4천900만 원) 이하 계층에서 39%에 달했다, 반면 연소득 10만 달러(1억2천만 원) 이상인 계층에서는 13%에 그쳐 저소득층의 고용 불안이 훨씬 컸다.



제도마다 장단점이 있어 미국과 유럽 중 어느 쪽이 낫다고 일률적으로 재단하긴 쉽지 않다.

미국의 노동유연성은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지상 명제인 이윤 추구에 더 효율적이고 노동자와 나누어 가질 '파이'를 더 키우는 장점이 있을 수 있다. 유럽의 사회안전망은 노동자가 급여에서 일정 부분을 부담금이나 세금으로 낸 결과다. 유럽의 높은 조세부담률은 종종 복지국가의 그림자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식 노동유연성이 노동자, 특히 저소득과 취약계층에게 더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황이라면 유연성은 그야말로 비수와 같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로머 뉴욕대 교수는 포린폴리시에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연한 노동시스템과 자유시장 접근법에 자부심을 느꼈다"며 "현재 위기는 이런 레이거노믹스 개념에 치명타를 날려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감세, 규제완화를 추진한 레이거노믹스적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럼비아대 교수는 "코로나19 대유행은 취약한 건강보험시스템, 불평등, 소득 불안정이 자리 잡은 이 땅(미국)에서 완벽한 근거지를 찾았다"고 꼬집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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