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슐린, 알약으로 복용할 날 머지않았다"
알약 제조 가능한 '이중 교량' 펩타이드 선별법 개발
스위스 로잔 연방 공대 연구진, '네이처 의생물공학'에 논문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짧은 아미노산 사슬 구조를 가진 펩타이드는 몸 안에서 다양한 기능 조절에 관여한다.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식물과 박테리아 안에도 이런 펩타이드가 존재한다.
펩타이드는 의약품의 원료로도 쓰인다. 이미 허가받은 것만 40종이 넘고, 현재 임상시험 중인 것도 수백 종에 달한다.
예컨대 포도당 대사를 조절하는 인슐린이나, 이식 기관의 거부 반응을 억제하는 사이클로스포린 등이 다 펩타이드 제제다.
현재 전 세계 펩타이드 제제 시장은 수십억 달러 규모로 커졌다.
하지만 펩타이드 제제는 의료와 제약 양 측면에서 큰 약점을 안고 있다. 입을 통해 복용하는 '경구용' 제제로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가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몸에 놓아야 하는 것도 알약 형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한 소화관 효소를 견뎌내고, 원하는 질병 표적에 정확히 작용하는 '이중 교량' 펩타이드 선별법을 스위스의 로잔 연방 공대(EPFL) 과학자들이 개발했다.
인슐린 같은 펩타이드 제재를 알약 형태로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이 연구를 수행한 EPFL의 크리스티안 하이니스 교수팀은 12일 관련 논문을 '네이처 의생물공학'(Nature Biomedical Engineering)에 발표했다.
사람의 위장에는 음식물의 펩타이드를 분해하는 소화 효소가 다량 존재한다. 그래서 펩타이드 기반의 의약품도 멀쩡하게 소화관을 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미노산 사슬의 양 말단을 '화학적 다리'(chemical bridge)로 연결한 고리형 펩타이드(cyclic peptide)는 선형보다 더 안정적이고 효소 공격에도 더 잘 견딘다.
하이니스 교수팀은 2018년 두 개의 화학적 다리가 들어가는 '이중 교량' 펩타이드를 개발했다.
그러나 다리를 두 개나 놓은 고리형 펩타이드도 소화관 효소의 엄청난 공세를 견디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이번에 개발한 선별법은 독한 소화관 효소를 견뎌낼 뿐 아니라 원하는 질병 표적에만 정확히 작용하는 이중 교량 펩타이드를 가려내는 것이다.
먼저 연구팀은 생성 코드를 무작위로 부호화한 수십억 종의 펩타이드를 이중 교량으로 연결했다. 펩타이드의 '등뼈'(backbone)에 구조적 제약을 가해 소화관 효소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이어 소의 장에서 추출한 소화 효소에 노출해 불안정한 것들을 배제한 뒤 살아남은 펩타이드 풀(pool)에 표적 단백질을 집어넣어, 원하는 질병과 결합하는 것들만 골라냈다.
이 선별법을 사용하면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같은 이 복잡한 과정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연구팀은 설명한다.
실제로 연구팀은 혈전 생성을 줄이는 트롬빈 억제 유도 펩타이드를 알약 형태로 만들어 생쥐에 투여했다.
그랬더니 혈류에는 소량만 도달했지만, 전체 소화관은 대부분 온전하게 통과했다. 소화관의 분해 작용을 견뎌냈다는 건 경구용 펩타이드 제제를 개발하는 핵심 단계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현재 이 선별법을 사용해 소화관의 표적에 직접 작용하는 경구용 펩타이드 제제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이니스 교수는 "소화관의 세균 감염뿐 아니라 크론병이나 궤양성 대장염 같은 만성 염증 질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면서 "이런 질환의 주요 표적인 인터류킨-23에 작용하고, 소화관 효소에도 내성을 보이는 펩타이드를 만드는 데 이미 성공했다"라고 말했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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