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코로나19의 또 다른 피해자…잊혀진 난민들

입력 2020-04-17 07:07
[특파원 시선] 코로나19의 또 다른 피해자…잊혀진 난민들

터키 '유럽 국경 개방' 선언…그리스 국경에 난민 수만 명 몰려

그리스 철벽 봉쇄에 난민·그리스 경찰 간 물리적 충돌

코로나19 창궐에 관심 줄어…바이러스 확산 우려에 국경서 철수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더는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을 막지 않겠다"

지난 2월 27일(현지시간) 저녁 터키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익명의 고위 관계자 발언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터키 정부는 지난해부터 수차례 "난민에게 유럽 문을 열어주겠다"며 유럽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번은 허언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스탄불의 시외버스 정류장은 난민들로 북적였다. 이들의 목적지는 그리스 국경과 맞닿은 터키 북서부 에디르네 주(州)였다.

하루 만에 터키-그리스 국경의 파자르쿨레-카스타니에스 검문소 주변으로 1만명이 넘는 난민이 몰려들었다.

터키가 수용 중인 난민은 약 400만명. 이 가운데 2011년부터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 출신 난민이 360만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의 목적지는 유럽이다. 이른바 유럽 선진국에도 400만명은 버겁다. 일부 소국에는 국가 정체성마저 흔들릴 수 있는 숫자다.

유럽은 터키의 '국경 개방' 조치를 두고 "목에 칼을 겨눈 것"이라며 맹비난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는 "목에 칼이 겨눠진 채로 터키와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터키는 유럽을 향해 "당신들이 무슨 약속을 지켰나"라고 반박했다.

터키가 최대 난민 수용국가가 된 것은 2016년 유럽연합(EU)과 체결한 난민송환협정(난민협정)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과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의 발호로 2015∼2016년 100만명이 넘는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자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중도 정부가 붕괴하는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EU는 2016년 3월 이주민 대량 유입에 제동을 걸고자 터키와 난민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터키는 난민의 유럽행을 차단하고 EU 국가에 도착한 난민을 터키로 송환해 수용하기로 했다.

대신 EU는 총 60억 유로(약 8조원)를 터키에 지원하고 터키에 수용된 난민 7만명가량을 EU 각국에 재정착시키는 한편, 터키에 무비자 입국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난민 협정 체결 이후 4년이 지난 지금 EU 내 불법 입국자 수는 97% 감소했다.

그러나 EU는 터키 내 난민의 재정착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터키인에 대한 비자 면제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

지원금 역시 터키 정부에 직접 자금을 이전하지 않고 터키 내 난민 기구를 통해 집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마저도 4년간 집행한 금액은 약속한 60억유로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은 "EU는 터키에 한 약속 중 대체 어느 것을 지켰나. 약속한 60억 유로 중 절반도 난민에게 지원되지 않았다"며 "당신들은 지난 몇 년간 눈을 감아왔다. 이제 책임질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터키가 태도를 바꾸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수만 명에 달하는 난민 홍수를 막기 위해 터키 국경에 군·경을 집중 배치했다.

EU 지도부도 "그리스 국경이 곧 유럽의 국경"이라며 그리스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가 '철벽 봉쇄' 의지를 밝히자 터키-그리스 국경은 사실상 전쟁터로 변했다.

그리스 측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을 뜯어내기 위해 건장한 남성으로 구성된 '난민 돌격대'가 구성됐다.

그리스 군·경은 물대포와 최루탄·고무탄을 사용해 이들의 전진을 저지했고, 터키 측은 그리스 군·경이 실탄을 발포해 난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도 그리스 군·경의 발포로 적어도 난민 2명이 숨졌으며, 1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그리스의 앙숙인 터키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터키는 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리스 국경에 군·경 특수부대를 배치했다.

터키 공군의 F-16 전투기가 그리스 국경을 따라 저공비행에 나서자, 그리스 공군의 F-16 전투기가 대응 비행하는 장면이 난민의 휴대전화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국경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리스 정부는 국경 인근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하는가 하면 기갑부대를 터키 국경 코앞에 전진 배치했다.

일부 난민이 삼엄한 감시를 뚫고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지만 그리스는 이들이 입국하는 즉시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자 그리스 국경 앞에 몰려든 난민들은 거대한 난민촌을 형성하고 그리스 정부를 향해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한 달 가까이 양측의 대치가 이어지면서 장기전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외부 요인으로 상황은 급반전했다.

남의 일로 생각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럽을 덮친 것이다.

밀집도가 높은 난민촌이 코로나19의 확산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었고, 난민에 대한 유럽의 여론은 훨씬 악화했다.

그리스는 한층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그리스로 유입하는 이주민 중 상당수가 코로나19 사례가 많이 나온 이란 출신"이라며 "이미 공공 보건 문제로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 섬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티스 미타라키 그리스 이주·망명부 장관 역시 "바이러스가 우리 섬에 유입되기 전에 감염된 이주자들에 맞설 것"이라며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난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터키·EU 정상 간 논의도 코로나19 확산에 뒷전으로 밀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이스탄불에서 만나 난민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으나, 이 회의는 코로나19 우려로 화상회의로 대체됐다.

그마저도 구체적인 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자국 내 코로나19 확산 문제로 정신이 없는 통에 난민 문제에 기울일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언론의 관심도 차츰 난민에게서 멀어져갔다. 지난달 초에는 터키-그리스 국경의 난민 관련 기사가 쏟아졌지만,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언론의 관심은 온통 코로나19에 쏠렸다.



외부의 관심이 끊어진 난민들은 골칫덩이가 됐다.

터키 내부에서도 그리스 국경의 난민촌이 코로나19 확산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터키 정부는 지난달 말 그리스 국경 앞의 난민들을 철수시켰다.

에디르네 주 정부는 지난달 27일 "난민들을 버스에 태워 이용 가능한 게스트 하우스로 옮겼다"고 밝혔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이들은 다시 한번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야 했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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