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일본 긴급사태 선포 후 '방콕 모드'로 전환

입력 2020-04-08 11:30
수정 2020-04-08 19:07
[르포] 일본 긴급사태 선포 후 '방콕 모드'로 전환

도쿄 도심 인파 확연히 줄어…재택근무 확산 영향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스테이 홈(Stay home)!"

일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도쿄 등 전국의 7개 광역지역에 선포한 긴급사태가 발효한 첫날인 8일.

인구 1천364만명(2018년 기준)이 거주하는 메가시티인 도쿄의 도심은 코로나19 때문에 긴장감이 한층 커진 분위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출근길의 혼잡도는 눈에 띄게 떨어지고, 불가피하게 직장으로 향하는 시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덮었다.

타인과 '일정한 거리'(social distancing)를 두라고 요구하는 코로나19는 사회적 동물로 불리는 인간의 군집 성향을 부인하는 전염병이다.

일본 정부는 이 점을 들어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밀폐(密閉), 밀집(密集), 밀접(密接) 등 3개의 밀(密)을 피하라고 국민에게 주문하고 있다.



도쿄도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는 전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일본의 황금연휴가 끝나는 내달 6일까지 한 달간 긴급사태를 선포하는 것에 보조를 맞춰 본인과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테이 홈' 해달라고 영어 표현을 동원해 도쿄 시민에게 호소했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비장의 카드로 꺼내든 '긴급사태' 선포는 지난달 13일 국회를 통과한 '신종 인플루엔자 등 대책 특별조치법'에 근거한다.

일본은 2009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호흡기 질환인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의 적용 대상에 코로나19를 포함했다.

이 법에 따라 중앙정부 수반인 총리는 코로나19의 전국적 확산으로 국민 생활과 경제가 심각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면 지역과 기간을 정해 긴급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데, 그것이 현실화한 것이다.



긴급사태 상황에선 해당 광역단체(都道府縣)장이 전염병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출 자제 등 개인행동을 제약하는 조치를 요구하거나 지시할 수 있다.

또 토지나 건물의 임시 의료시설 강제 사용 등 강제력을 띠는 대응 조처를 할 수 있지만, 이는 일반 시민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일반 시민의 개별 행동을 규제하는 핵심 골격은 강제성이 없는 '요청'뿐이다.

이는 경찰을 거리 곳곳에 배치해 이동을 통제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국가들과는 다른 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긴급사태의 '긴급'이라는 단어가 일본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제력에 버금가는 효과를 내고 있음이 거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8일 출근길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 교통편은 평소보다 훨씬 한산한 모습을 보였다.

승객을 찾지 못한 채 '공차'(空車) 표시를 하고 달리는 택시가 잇따라 눈에 들어왔다.

평소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붐비던 일본 교통망의 심장부인 도쿄역은 마치 시골 역 풍경과 흡사하다고 할 만큼 인파가 확연하게 줄었다.

이용객 감소로 신칸센 등 기간망 열차가 감편 운행되고, 도쿄역과 전국 곳곳을 잇는 주요 노선의 버스 편 운행이 잠정 중단된 영향이다.



도쿄역 인근에 있는 국제전시장인 '도쿄포럼' 주변은 일본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사무실이 몰려 있다.

이 때문에 출근 시간대에 '넥타이 부대'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이날은 '부대'라고 부를 만큼의 인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날 출근 시간대에 그나마 '인파'라고 부를 만한 행인 집단을 볼 수 있었던 신바시(新橋)역 주변에서 만난 30대 남성 직장인은 이렇게 말했다.

"큰 회사들은 재택근무에 들어간 곳이 많아요. 저는 중소 건설업체에 다니는데, 당장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출근하고 있습니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저도 집에 있을 거 같습니다."



아베 총리가 긴급사태를 좀 더 일찍 선포했어야 했다고 지적한 이 직장인은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 눈치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부와 지자체의 자숙 요청을 따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일본 정부의 한 공무원은 "긴급사태가 선포된 후 개인적으로 잡았던 모든 약속을 취소했고 다들 그렇게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부서도 필수 최소 인원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로 전환했다며 이번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는 고이케 지사가 얘기한 것처럼 "'스테이 홈'(방콕)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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