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제재 그리고 불신…'삼중고' 직면한 이란

입력 2020-03-15 09:00
전염병, 제재 그리고 불신…'삼중고' 직면한 이란

미 제재 복원으로 의료 체계 허약해져…코로나19 환자·사망자 점증

서방 정부·언론, 이란 코로나19 인명피해 은폐 의혹 거듭 제기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나라를 가릴 것 없이 각국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확산의 위기를 겪는 가운데 이란 정부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다른 '상대'와 맞서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란은 일단 코로나19 전염 상황이 여느 곳보다 심각하다.

14일(현지시간) 현재 이란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만2천729명, 사망자는 611명으로 중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인명피해 수는 최근 일주일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점증하는 흐름이다.

이란은 군을 동원해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방역 작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걸프 지역의 산유 부국을 제외하고 이란이 중동에서 나름대로 의료 체계가 갖춰졌고 의료진의 수준이 높다고 평가되는 데도 전염병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의 제재를 꼽을 수 있다.

미국과 이란은 2015년 7월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역사적으로 타결해 핵 프로그램과 관련한 미국의 대이란 경제·금융 제재가 일부 완화됐다.

이 덕분에 이란은 원유를 외국에 팔 수 있었고 그 돈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는 정상적인 교역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핵합의가 이행된 지 1년 만인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취임했고 그는 공약대로 이듬해 5월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핵합의로 제거된 대이란 제재는 그해 8월부터 되살아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재를 원상으로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대 압박' 정책을 구사하면서 핵합의 이전보다 더 강한 제재를 이란에 부과했다.



미국이 제재를 복원하자 외국 기업과 이란의 교류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의약품, 의료장비와 같은 인도주의적 물품은 미국의 제재에서 예외지만 금융 제재로 이란에서 수출 대금을 받지 못하는 서방의 제약사, 의료 업계는 이란과 거래를 사실상 끊었다.

이런 이유로 인도적 물품의 교역 제한은 미국의 제재가 이란 정권뿐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생존에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정부는 코로나19가 이란에서 급속히 확산하자 6일 "미국의 제재를 지키면서도 이란 국민을 돕기 위해 인도적 물품을 공급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라며 "설령 미국인이라도 이란에 약품을 기부할 수도 있다"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14일 유엔 사무총장에 보낸 서한에서 "국제기구와 유엔 회원국이 미국의 비인간적인 대이란 제재를 무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코로나19가 이란을 휩쓰는 지금 제재를 즉시 풀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도 7일 "트럼프는 이란이 코로나19에 맞서 싸우는데 필요한 자원을 빨아들이기 위해 불법 제재로 이란을 더 악의적으로 옥죄고 있다. 전 세계는 미국의 '의료 테러리즘'에 침묵해선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제재로 원유 수출이 극도로 제한되면서 이란의 외화보유고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약품과 의료 장비를 충분히 살 수 있는 외화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 '적'보다도 이란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대는 서방이 이란에 가진 뿌리 깊은 불신과 편견이다.

이란 정권의 발표와 통계는 서방 정부와 언론에 항상 의심을 산다.

지난달 19일 이란에서 처음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뒤 초기에 이란의 치명률은 다른 발병국과 비교해 유독 높았다.

서방은 이에 대해 이란 정부가 확진자 수를 숨긴다며 의심했다. 지난달 말 세계보건기구(WHO), 중국에서 검진 장비가 도착하자 확진자 수가 늘어나자 치명률이 평균치에 근접했다.

그러자 서방 언론은 이란 정부가 치명률을 낮추려고 사망자 수를 줄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란에서 부통령, 장 차관급, 의원 등 고위 인사가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이 알려지자 서방의 주류 언론은 이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면서 대체로 이란의 체제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방에서도 장 차관급 고위 인사가 잇달아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지도부의 붕괴를 관측한 언론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3일 트위터에 "코로나19가 생물학전이라는 이란 최고지도자도 실은 안다. 생물학적 공격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이라며 이란 정부가 코로나19의 인명피해를 축소, 은폐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핵합의를 파기한 이유도 이란의 위반을 증명하는 구체적 근거가 아닌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란의 약속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었다.

이란 국영방송은 코로나19와 관련해 위생 수칙만큼이나 인터넷과 서방언론의 '가짜 뉴스'에 동요하지 말라는 캠페인을 반복해서 방송한다.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도 서방 언론의 공세적 보도를 이란이 부인하는 장면이 어김없이 벌어졌다.

영국 BBC 이란어 방송은 지난달 28일 현지의 익명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의 코로나19 사망자가 최소 210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란 정부의 사망자 집계는 34명이었다.

BBC 이란어 방송은 이란에서 일어나는 각종 자연재해와 시위 유혈진압 등 폭력 사건의 인명 피해를 익명의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 당국의 집계보다 월등하게 높게 보도하곤 한다.

이에 대해 이란 보건부는 당일 "BBC가 제기한 의혹은 전혀 근거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 호흡기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환자를 모두 합해도 그런 숫자(210명)가 되지 않는다"라며 "BBC는 이란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를 보도했다"라고 비판했다.

이란은 서방의 여론전에 수세적인 입장이다.

유수의 서방 언론이 주도하는 여론전은 이란 입장에선 '기울어진 운동장'인데다 올해 1월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 사건 때 사건 당일 기계적 결함으로 추락했다고 단언했다가 사흘 뒤에서야 격추 사실을 시인하면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탓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서방과 이란의 상대방에 대한 적대와 불신은 이제 원인 제공자를 찾는 일이 무의미할 만큼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 증폭됐다.

다른 현안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위기 역시 서방 정부와 매체는 이란을 '거짓말 정권'이라는 틀로 규정하려 하고 이란은 외부의 적대적 여론전에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이를 막아내는 데 내부 단속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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