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씩 먹이다'…악수 외면한 트럼프, 국정연설문 찢은 펠로시

입력 2020-02-05 15:29
수정 2020-02-05 22:58
'한방씩 먹이다'…악수 외면한 트럼프, 국정연설문 찢은 펠로시

국정연설장서 심야 '피튀기는 신경전'…보복 주고받은 두사람

펠로시 흰색정장에 '탄핵안 가결' 브로치…'정치적 탄핵' 선언 표시



(워싱턴=연합뉴스) 송수경 특파원 = '미국 정치권의 최대 앙숙이 서로 한방씩 주고받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4일 밤(현지시간) 국정연설 현장에서는 탄핵 문제를 놓고 완전히 대척점에 섰던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간에 살벌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연단에 올라선 트럼프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이 내민 손을 애써 못 본체 외면했고, 연설이 끝나자 펠로시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뒤통수에 대고 국정연설문을 쫙쫙 찢어버렸다. 두 사람의 '뿌리깊은 앙금'과 '뒤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지난해 10월 16일 미군 철수로 촉발된 터키의 시리아 침공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여야 지도부 간 백악관 회동에서 서로를 향해 험악한 말을 주고받고 헤어진 이래 4개월 만에 이뤄진 극도로 불편한 만남이었다. 탄핵을 진두지휘한 야당의 일인자 대 무죄선고를 앞둔 탄핵 대상의 대좌였던 셈이다.



지난해 12월18일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둘러싼 하원의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검은 상복 차림으로 하원 본회의장에 들어섰던 노정객 펠로시 하원의장은 이날도 '패션의 정치학'을 보여줬다.

그는 지난해 국정연설 때에 이어 흰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흰색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들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상징하는 색이자 항의의 표시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다른 여성의원들 상당수도 이날 흰색 옷을 입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하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금색 '공화국의 지팡이' 브로치는 탄핵안 표결 때에 이어 이날도 펠로시 하원의장의 정장 왼쪽 옷깃에 고이 꽂혀 있었다.

상·하원 합동의회 형식으로 이날 국정연설이 열린 하원 의사당은 펠로시 의장의 '안마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 '무죄선고'를 통해 탄핵 굴레를 완전히 벗은 홀가분한 상태로 '개선장군'처럼 국정연설장에 입장하길 원해왔지만 여야 간 조율 과정에서 탄핵안 표결은 국정연설 이튿날인 5일로 잡히면서 이러한 희망 사항은 물거품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장해 연단에 올랐을 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싸늘한 냉기류가 내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단 한 차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자리를 뜰 때까지 엇갈린 시선을 연출했다.

먼저 한방을 먹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함께 연단 윗자리에 앉아있던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국정연설 원고를 건네자 팰로시 하원의장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곳을 쳐다보며 이를 뿌리치자 펠로시 하원의장이 머쓱한 듯 재빨리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상황에 대해 펠로시 하원의장이 '나는 시도했다'고 말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채 눈썹을 추켜올리는 듯했다고 보도했다.

NYT는 '트럼프와 펠로시, 국정연설에서 모욕을 주고받는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날 밤 국정연설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펠로시 하원의장 간에 적대감이 흘렀다"며 두 사람의 만남은 이날 국정연설에서 가장 기대를 모았던 순간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의 역학관계가 오롯이 노출된 '밤'이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악수 그리고 나서 펠로시 하원의장의 '가벼운 복수'가 이어졌다.

펠로시 하원의장은 관례로 대통령의 입장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미국의 대통령을 소개하게 된 것은 크나큰 특권이자 특별한 영광"이라는 문구를 생략한 채 "의회 멤버 여러분, 미국의 대통령이다."라고만 했다고 NYT는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정연설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펠로시 하원의장은 능숙하게 돌덩이 같은 표정을 유지하며 입술을 오므린 채 눈을 밑으로 깔고 있었다고 NYT는 전했다. 다른 곳을 쳐다볼 때도 있었는데 시종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화당 의원들이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연달아 칠 때도 꼼짝 않고 대부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마약 범죄자의 형량을 낮추고 판사의 재량권을 확대하는 내용이 담긴 초당적 형사사법 개혁 법안인 '첫걸음법'(First Step Act)을 언급하자 펠로시 하원의장은 예외적으로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고 NYT는 전했다.

펠로시 하원의장이 택한 '응징'의 하이라이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마무리할 무렵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을 끝내며 "신의 축복이 있길…"이라고 읽어내려가자 펠로시 하원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동작을 꽤 크게 하며 네차례에 나눠 국정연설문을 갈가리 찢는 것으로 강펀치를 날렸다.

악수를 거절당한 데 따른 앙갚음 차원도 있었을 수 있지만, 그에 더해 비록 상원에서의 수적 열세에 밀려 트럼프 대통령을 법적으로 탄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치적 탄핵'을 선언하며 대통령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뜻도 깔린 듯 보였다. 실제 펠로시 하원의장은 전날 인터뷰에서 "상원의 결과와 상관없이 트럼프 씨는 영원히 탄핵당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뒤를 쳐다보지 않은 채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다.

앞서 펠로시 하원의장은 지난해 국정연설 때에는 경멸의 뜻이 담긴 듯한 묘한 웃음과 함께 조롱의 '물개박수'를 보내는 장면으로 SNS상에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hanks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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