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기행] 예술가의 고집으로 빚어낸 생쌀 발효 막걸리
경기도 평택 호랑이 배꼽 양조장
(평택=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경기도 평택의 '호랑이 배꼽' 막걸리는 예술가의 고집 덕분에 탄생한 술이다.
평택의 화가 이계송 씨 가족은 막걸리 빚는 일반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고 생쌀을 발효시키는 독특한 양조법을 개발해 10년 넘게 고수하고 있다.
세 차례의 담금과 100일의 저온 숙성을 거쳐 느리게 탄생한 막걸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맛을 자랑한다.
◇ 막걸리가 시큼털털하다고?
이름부터 눈길을 끌었다. '호랑이 배꼽' 막걸리라니. 갤러리 분위기의 시음장에 들어서니 와인잔처럼 생긴 전용 유리잔에 막걸리를 따라 준다.
한 모금 들이켰다. 이름만큼이나 맛도 독특하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 부드럽다.
인공감미료를 넣은 시중의 막걸리처럼 톡 쏘면서 혀를 자극하는 단맛은 없지만, 배향이 스치는 은은한 단맛이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풍긴다.
막걸리는 시큼털털하다는 편견을 확 깨주는, 그런 맛이다. '막걸리계의 평양냉면'이라는 이혜인 대표의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느 막걸리와 확연히 구분되는 호랑이 배꼽만의 특별한 맛은 독특한 양조법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 이 화백의 뒤를 이어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 대표는 "쌀을 쪄서 만든 고두밥을 일주일가량 숙성시키는 일반적인 막걸리와 달리 생쌀을 저온에서 100일간 숙성 시켜 만드는 것이 우아한 맛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 호랑이 배꼽에서 느리게 익어갑니다
경기도 평택의 호랑이 배꼽 양조장은 서해대교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최남단인 이곳은 함평 이씨가 600년간 거주한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당의 느티나무 아래 놓인 한반도 모양의 조형물은 '호랑이 배꼽'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보여준다. 기상하는 호랑이를 닮은 우리나라 지도에서 양조장이 있는 평택은 배꼽 자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배꼽처럼 전통주의 과거와 현대를 잇는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기도 하고, 한국 막걸리의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기도 하다.
양조장 건물은 노랗게 칠한 우체통과 문이 눈길을 끈다. 오방색 중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은 호랑이 배꼽의 상징색이기도 하다.
60년 된 이 건물은 흙과 나무로만 지어졌다. 원래 양잠을 하던 잠실이었지만, 양잠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한동안 빈 건물로 방치됐다가 고향 집으로 내려온 이 화백이 양조장으로 되살렸다.
◇ 질 좋은 암반수와 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양조장을 둘러보기 전 옆에 있는 또 한 채의 한옥에 들어가 봤다. 방앗간을 했던 이 화백의 아버지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 지은 고택이다.
당시 이 화백의 어머니가 방아 찧고 남은 자투리 쌀을 모아 막걸리를 만들기도 했으니 이씨 집안의 양조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ㅁ'자 형태의 한옥 중앙에는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수도관이 설치되어 있다. 화강암을 거쳐 자연적으로 정화된 이 지역 암반수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평택의 질 좋은 암반수와 쌀, 술을 빚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 이 세 가지가 호랑이 배꼽 막걸리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됐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이곳은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인 제헌 국회의원 선거 투표함이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방앗간이라는 장소가 동네 사람들 누구나 드나들던 사랑방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투표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촬영장소로 쓰이기도 했던 이곳은 현재 시음과 막걸리 빚기 체험, 공연이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세 차례의 담금과 100일의 숙성
서양화가였던 이 화백이 술 빚는 장인이 된 것은 10여년 전이다. 귀촌한 그가 처음 시도했던 것은 막걸리가 아니라 와인이었다.
작품 계약 때문에 유럽을 자주 방문하며 와인 제조 현장을 접했던 이씨는 평택의 특산물인 배로 와인을 만들어 상품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로 좀 더 대중적인 막걸리로 주종을 바꿨고, 끈질긴 노력 끝에 와인을 만드는 기법을 접목한 독특한 막걸리 제조법을 완성했다.
양조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노란색 문을 열고 들어서니 향긋한 내음이 코끝에 감돌았다.
막걸리와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는 이곳은 일반적인 양조장과 달리 쌀을 저장하는 공간이나 쌀을 찌는 기계가 없다. 찌지 않은 생쌀을 이용해 막걸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혜인 대표는 "술 만들기 하루 전 인근 정미소에 주문을 넣어 갓 도정한 쌀을 쓰기 때문에 쌀 저장공간이 없다"며 "갓 도정한 쌀을 고집하는 것은 생쌀로 술을 빚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막걸리는 대개 일주일가량 숙성한다. 숙성기간이 긴 막걸리도 한 달을 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생쌀을 한 달 발효시켜서는 맛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저온 장기 숙성이다.
이씨는 쌀과 누룩을 섞어 23도의 실내에서 40일간 발효시킨 다음 2∼5도의 저온 저장고에서 60일가량 더 숙성시킨다. 이 100일 숙성법은 여러 조건에서 수차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백미로 만드는 일반적인 막걸리와 달리 현미를 섞어 술을 빚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1차로 담근 밑술에 두 차례 쌀과 누룩을 섞는 삼양주 방식으로 술을 빚는데, 처음 담그는 밑술은 현미와 쌀누룩으로 빚는다.
이 대표는 "껍질째 술을 담그는 와인 제조 기법에서 착안한 것"이라며 "현미 껍질에 담긴 쌀의 영양이나 향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발효실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온기와 함께 바닐라 향 같기도 한 부드러운 향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술통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니 미색으로 익어가는 술 표면에 조금씩 기포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담근 지 9일 지난 술이다.
이 상태로 40일 정도 더 발효가 진행되면 술지게미가 가라앉으면서 윗부분에는 연한 노란색의 맑은 액체가 남는다.
맑은 액체와 탁한 부분을 섞은 뒤 물을 첨가해 도수를 낮추면 막걸리가 되고, 맑은 윗부분만 떠내 증류시키면 증류식 소주가 된다.
발효실 옆 증류실에는 커다란 증류기가 놓여 있다. 이 화백이 직접 설계한 것이다.
동으로 만든 일반적인 증류기와 달리 스테인리스로 제작됐다. 쌀 원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다.
증류 작업은 한겨울에만 진행된다. 막 추수한 쌀로 빚었을 때 향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증류된 소주는 달항아리에 담겨 최소 3년에서 10년까지 숙성한다. 이렇게 탄생한 소주는 '소호'(笑虎)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웃는 호랑이라는 뜻이다.
'소호' 소주는 세 차례 이상 증류한 56도 제품과 두 번 이상 증류한 36.5도 제품으로 나뉜다. 도수는 높지만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화백이 만든 양조장은 도예가 겸 요리연구가인 아내 이인자 씨, 디자이너 출신인 큰딸 혜범 씨와 사진기자였던 둘째 딸 혜인 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술의 상품화와 디자인을 도왔던 두 딸은 아예 사업을 이어받아 직접 술을 빚고 있다.
예술가 집안의 양조장답게 곳곳에 예술작품이 놓여 갤러리 같은 분위기다.
양조장에서는 매달 견학 프로그램과 막걸리 빚기 체험, 공연, 미식회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미식회에서는 TV 프로그램에 준치 김치 명인으로 소개되기도 한 이인자 씨의 맛깔난 음식을 술과 함께 즐길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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